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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춤바람난 올림픽 선수단?

곧 리우 올림픽이 열립니다. 올림픽 열기가 예전같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시작이 되고, 메달레이스가 펼쳐지면 관심을 끌 것입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4년간 선수들이 흘린 땀을 보상받는 올림픽 무대를 감상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겠지요. 한국은 지금으로부터 68년전인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음 참가했습니다. 당시의 신문을 보거나 당시의 증언을 들으면 정말로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 같습니다. 참가비를 마련하려고 복권을 발행한 이야기, 금메달은 따논 당상이라고 큰소리쳤다가 줄줄이 탈락한 마라톤 선수들, 최소한 은메달 동메달은 확실하다고 떵떵 거리다가 0-12로 참패한 축구 선수들, 경기 전날 공업용 용액을 술로 착각해서 마셨다가 밤새도록 뒹굴었던 선수와 아나운서 이야기 등등. 참으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겨우 동메달 2개에 그친 선수들에게 당시 언론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지요. 외신들은 ‘한국선수단이 영국 소녀들과 딴스(댄스)를 추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비아냥 댔답니다. 올림픽을 앞둔 지금,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92회’는 ‘올림픽 첫 출전, 춤바람 난 한국선수단 이야기’를 풀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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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입이 있어 말을 한다면 우쭐거리고 춤을 추면서 파란 많은 지난 날을 눈물로 독백하리라.”
1948년 7월 29일 런던 엠파이어 스타디움에서 런던올림픽 개막식이 열렸다. 태극기를 앞세운 한국선수단은 29번째로 입장했다. 현지에 파견된 민재호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의 라디오 중계멘트가 떨렸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불과 3년 남짓…. 더욱이 아직 정식 독립국가도 아니었던 때였다. 그렇지만 ‘KOREA’라는 국호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울 수 있었던, 얼마나 가슴 벅찬 올림픽 참가였겠는가.
한국의 런던 올림픽 참가는 민재호의 말처럼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해방후 2년만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단./국가기록원 제공 

 ■비행기 사고로 숨진 올림픽의 넋
 당시 독립국가도 아니었던 처지였던 ‘조선’의 참가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있었다.

바로 재미교포 전경무 선생이었다. 1901년 평북 출신으로 7살 때 부모를 따라 이민을 떠난 그는 미시간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한 그는 48 런던올림픽 참가를 목표로 구성된 올림픽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 때부터 해방 조선의 올림픽 참가를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특히 미시간대 동창이자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인 애버리 브런디지를 통해 IOC 가입의 정당성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과정에서 독립국가가 아니면 IOC 가입이 불가능하다는 나쁜 소식이 해외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전경무 선생의 끈질긴 외교적인 노력은 통했다.

마침내 1947년 6월20일부터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서 조선의 올림픽 참가가 결정될 예정이었다. 참가는 사실상 결정된 것이었으므로, 총회는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5월29일 전경무 선생은 가벼운 마음으로 미군정 하지 중장이 내준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을 이륙했다.

비행기엔 전 선생을 비롯해 33명의 승객과 8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C54호 수송기는 일본 아쓰기(厚木) 비행장을 불과 8마일을 앞두고 무선교신까지 무사히 주고받았다. 하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비행장 서부의 산악지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전경무 선생을 비롯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비보를 접한 올림픽대책위는 슬픔에 잠길 틈도 없었다. IOC 가입건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재미 사업가 이원순씨를 스톡홀롬에 급파했다. 다행히 전경무 선생이 다져놓은 외교노력 덕분에 ‘IOC’ 가입과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가 성사됐다.  

올림픽 출전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올림픽복권. 복권 앞면에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경무씨의 사진을 넣었다. /국가기록원

■선수선발 둘러싼 아귀다툼
하지만 참가비용이 문제가 됐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지 불과 3년도 안됐고, 더구나 기댈 민족자본이라곤 없었으니 거액의 참가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대책위는 할 수 없이 미군정청을 찾았다. 미군정청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올림픽 후원회도 조직했다. 머리를 맞대고 비용마련 방안을 궁리한 끝에 복권발행을 생각해냈다.

이 아이디어를 미군정청에 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갬블(도박)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끈질긴 설득 끝에 복권발행이 허용됐다. 복권의 앞 면에는 비행기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된 전경무 선생의 사진을 담았다. 복권의 판매가는 1장에 100원이었는데, 100만장이나 팔렸고, 모두 8만달러의 비용이 충당됐다.  

경비조달에 한숨을 돌린 뒤 종목별 대표선수들을 선발했다. 축구·농구·역도·레슬링·마라톤·권투·사이클 등 7개 종목에 67명(선수 52명, 임원 15명)이었다.

52명 가운데 30대 선수가 31명(60%)에 달했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당초 1940년 올림픽은 일본 도쿄에서, 1944년 올림픽은 영국 런던에서 열리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9년 유럽에서 제2차대전이 발발했다. 두 차례의 올림픽은 열리지 못했다. 당시 ‘팔팔’ 했던 선수들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KOREA’의 이름으로 꿈에 그리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니….  

해방후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며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위해 거족적인 환송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환송행사에 모인 인파. /국가기록원 제공

이젠 서른을 훌쩍 넘긴 선수들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영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했다. 이들은 한창 때의 허명만을 믿고 각 경기단체의 고위층을 움직여 대표선수로 속속 선발됐다.

실력이 아니라 연장자의 순으로? 당대엔 장유유서가 통했던 것이다. 서로 가겠다는 ‘아귀 다툼’은 끔찍했다.
“그저 유람격으로 이번 기회를 노리고 덮어놓고 가야만 되겠다는 갈주의에 사로잡혀 세상에서 욕을 하든지 내 목적을 달성함에는 여하한 수단도 가리지 않겠노라고 무조건 하고 런던행을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이 반면에는 이번 올림픽에는 꼭 이 사람이 가야만 된다고 믿는 그 사람이 결국 못가게 된 것도 있다.”(<경향신문> 8월21일)

■대표탈락에 실망, 월북까지
당시 신문은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무려 60여차례의 회의 대부분은 선수선발을 둘러싼 것이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심지어 폭력사태가 나기도 했으며, 미군정청이 개입하기도 했다.

통상 12명의 엔트리를 제출해야 하는 농구의 경우 파견인원이 9명으로 줄였다. “5명이 출전하는 종목인데 뭐 12명이나 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늘 당선된 감독 선수가 내일에는 낙선된 일이 었고 오늘 탈락한 임원이 내일 또 당선된 일도 있었다.”(경향신문)

심지어는 과거의 병력(폐렴)을 빌미로 단념하라고 권유하는 등 갖가지 사유를 들어 런던행을 방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결과 농구와 축구는 전임감독없이 올림픽에 나서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축구의 경우 엔트리 18명 가운데 11명이 30대였다. 농구는 9명 가운데 7명이, 역도는 8명 가운데 6명이, 레슬링은 4명 가운데 3명이 30대였다. 

농구의 경우 당대 최고의 팀은 앞길이 구만리 같은 고려대 농구팀이었다. 고려대 소속 이혜재는 당대 최고의 골게터였다. 하지만 그는 선배들의 고집 때문에 끝내 대표에서 탈락됐다. 얼마나 낙담했던지 이혜재는 일절 소식을 끊고 잠적해버렸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고 한다.

불행한 일도 터졌다. 올림픽 엔트리에서 탈락한 젊은 대학생 11명이 월북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대한축구협회 평의원 겸 감사였던 현효섭이 서울대생 2명과 고려대생 4명, 연세대생 4명, 동국대생 1명 등 젊은 대학생 축구선수들은 데리고 간 것이다. 며칠 후 북한 라디오 방송은 “남조선 축구대표팀이 정부수립을 경축하여 펼쳐진 기념대회에 출전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대부분은 북한에 잔류했고 몇몇은 한국전쟁 도중 빨치산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당시 홍일점으로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이화여중생 박봉식이 원반을 던지고 있다. 박봉식은 대표선발전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지만 올림픽 무대에서는 경험부족을 드러내며 하위권에 쳐졌다. /국가기록원 제공

■"마라톤 금은 따논 당상"
2012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단의 단독이 베스트 디자인상을 받았다지만 64년 전의 단복은 그야말로 ‘촌티’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겨울용 양복지로 만든 단복을 입었던 탓에 땀범벅이었다. 1948년 6월21일 선수단은 거국적인 환송열기 속에 장도에 올랐다.


그 여정은 참으로 멀고도 험했다. 부산-일본 하카다-요코하마-중국 상하이-홍콩까지는 여객선으로 이동했다. 그후 홍콩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방콕-캘커타-뭄바이-카이로-암스테르담을 거쳐 20여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생전 처음 이국의 정취에 흠뻑 젖은 선수단은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고국에서 선수단에 거는 기대는 컸다.

특히 마라톤에 거는 굉장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손기정)과 동(남승룡)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1년 전인 1947년 보스톤 마라톤 제패한 서윤복과 최윤칠이 건재하고 있었다.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기록(2시간25분39)은 경이적이었디. 홍종오도 기대주였다.

축구도 ‘근거없는 자신감’이 팽배했다. 일본과 중국과의 전적에서 늘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자신감의 근거였다. 게다가 2차전 상대인 스웨덴은 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에 패배한 적이 있었으니까….  

당시 홍일점으로 출전한 이화여중 5학년생인 박봉식도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18살 박봉식은 그 해(1948년) 4월 28일 올림픽파견선발전 투원반 경기에서 37.08m를 던졌다. 이 기록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독일 선수가 던진 세계신기록(37m)를 능가한 것이었다. 당시 신문의 표현대로 ‘처녀의사’ 유관순을 길러낸 이화중학의 보배인 박봉식의 야무진 출사표.

“여자가 혼자이기 때문에 좀 섭섭해요. 앞흐로는 이런 대회에 위 조선 여성도 만히 참가하도록 해주기를 부탁해요. 기록이라고요? 과히 뒤떠러진 것 갓지 안해요.”(<동아일보> 1948년 4월28일)
이밖에 역도의 김성집(75㎏급)과 남수일(60㎏급)도 용상에서 세계신기록 보유자였다. 복싱의 한수안도 한번 해볼만한 선수로 꼽혔다. 그랬으니 국내에서는 당시의 예상은 마라톤에서 금메달은 확실하고 축구에서 은·혹은 동메달, 역도·복싱에서 몇 개의 메달을 건지는 것이었다. 이 정도였으니 전 국민의 성원을 받는 게 당연했다.  

한국-스웨덴의 축구 2회전 경기. 한국은 스웨덴을 얕잡아 봤지만 0-12로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얕보던 스웨덴에 0-12 대패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물안 개구리였다.

기대를 모았던 박봉식은 여자 투원반에서 자신의 최고기록에도 못미치는 33.8m로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레슬링 선수들도 2회전에서 모두 탈락했다.

축구는 첫 판에서 아주 고무적인 성과를 냈다. 세계중상위권인 맥시코를 5-3으로 제압한 것이다. 김용식·배종호·이유형·민병대·홍덕영·정남식 등 나름 스타급으로 구성된 터여서 으쓱할만한 스코어였다. 2차전 상대는 스웨덴이었다. 얼핏 보면 한 수 아래의 팀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이 스웨덴을 3-2로 꺾은 바 있었으니까. 그 때 일본대표로 뛰었던 이가 바로 김용식이었다. 그랬으니 스웨덴을 앝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팀은 영국 소년·소녀팬들의 사인공세에 시달렸다. 반면 스웨덴 팀은 우리 팀의 숙소와 연습장을 찾아와 전력탐색에 심혈을 기울였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재앙이 일어났다. 스웨덴은 압도적인 체격과 체력을 바탕으로 당시로는 드문 논스톱 패스로 우리 팀을 압도했다. 전반 4-0, 후반 8-0, 합계 12-0.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최다실점패. 22살의 골키퍼 홍덕영은 50여 개의 슛을 막아내느라 혼쭐이 났다나 어쨌다나. 여담이지만 스웨덴은 축구 우승을 차지했다.

■악몽의 레이스가 된 마라톤
마라톤은 악몽의 레이스였다. 8월7일 시작된 마라톤 레이스에서 최윤칠은 반환점을 돌면서부터 피치를 올리기 시작해서 27㎞부터 선두를 질주했다. 메인스타디움에서 기다리던 한국선수단은 38㎞지점까지 최윤칠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에 “이젠 우승이다”라며 환호했다.

하지만 막상 스타디움에 1착으로 들어오는 선수는 벨기에의 게일리였다. 또 반전이 일어났다. 마지막 트랙을 돌던 게일리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흐느적거렸다. 결국 뒤따르던 아르헨티나의 카브레라가 역전 우승했다. 게일리는 영국의 리처드에게까지 추월당해 3위로 걸어 들어왔다. 

게일리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던 최윤칠은 40㎞ 지점에서 그만 다리경련을 일으켜 쓰러지고 만 것이다. 결국 최윤칠과 게일리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다 탈진한 틈을 타 카브레라가 어부지리로 우승한 것이다. 처음부터 부진했던 홍종오는 25위(2시간56분51초6), 서윤복은 27위(2시간58분51초6)에 머물렀다. 우승자 카브레라의 기록이 2시간 34분 51초였다. 4년 전 손기정이 세운 우승기록(2시간29분12초)보다 4분이나 늦은 기록이었다.

마라톤의 부진 소식이 전해지자 난리가 났다. <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 보도.
“(마라톤) 참패소식이 라듸오를 통하여 국내에 알려지자 성미조급한 사람은 격분에 못이겨 ‘라듸오’ 통을 두드려 부셔버렸다는 등, 어떤 사람은 이번 마라톤 경주의 참패는 무슨 곡절이 꼭 잠재해 있다는 등 갖가지 억측과 유언비어가 날을 거듭하여 높아가고 있다. 두사람 이상이 뫃인(모인) 곧(곳)에는 반드시 마라톤 참패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 기사. 런던올림픽 참패의 요인을 6회 시리즈로 다뤘다. 신문은 선수들이 합심을 하지 못하고 사리사욕에 움직인 결과 참패했다고 분석했다.

■“마라톤 참패의 원이은 내분과 반목”
당시 <경향신문>은 참패의 원인 11가지를 꼽고 있다.
“1)각 개인의 실력만을 위주로 삼어 전반적에서 기력을 미리 소모했다. 2)국내에서의 협동정신 배양과 합동 연습기회가 단기간이었다. 3)감독이 많아(두사람) 선수 각자가 누구의 지시를 받어야 옳을 지 알 수 없다는 것과 감독의 불통일. 4)식사관계로 인한 도중의 사고발생. 5)선수 각자가 코-취의 지시에 불복종한 것. 6)조국의 영예를 몰각하고 자기개인의 영예를 위하여 서로 작전계획도 없이 질주하여 외국선수에게 어부의 리(利)를 주게 된 것. 7)자기의 역량만 알고 남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것. 8)최(윤칠)선수는 최선수대로, 서(윤복) 선수는 서선수 대로의 무모한 폭주는 우리가 실력부족하다든 홍선수로 하여금 유리하게 된 것. 9. 출발로부터 최선수는 단연 선두로 달렸으며 서선수는 선두를 안빼낄랴(빼앗기지 않으려고) 전반전에 너무 속도를 낸 것. 10)이상 모든 결과로 인해 국내에서 측정한 자기기록(서윤복 2시간32분1초, 최윤칠 2시간34분41초, 홍종오 2시간39분35초) 등의 기록에도 미치지 못한 가장 불량한 기록을 짖고 만 것. 11)한국 마라톤 선수들의 무모한 폭주는 드듸어 각국 마라톤 선수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및이게(미치게) 하여 국제적 위신을 일케(잃게) 하고 전체적으로 기록을 불량케 한 것.”

참패의 근본원인은 심각했다. 11가지 패인은 선수단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리고 있다.
“올림픽 출장전 합숙소에서~ 합숙의 목적을 몰각하고 A라는 선수는 개인행동을 취하여~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펴주어야 할 감독자조차 선수들을 합심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선수는 선수대로, 감독진은 감독진대로 불화햇다고 해도 3천만의 명예와 조국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서로 합심해서 외적(外敵)에 당함이 마땅하거늘~.”(<경향신문> 8월20일)

최윤칠 선수도 훗날 당시 훈련방법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불평 같지만 연습이 잘못되었어요. 참가선수가 저하고 서윤복·홍종오 등 3명이었는데 모두 경기에 미숙했었어요. 이렇게 선수가 미숙하면 코치의 힘이 절대적인 것인데…. 그런데 시합 1주일 전에 선수 자신이 마음대로 조절하라니 ‘쉬면 조절될 것이다’하고 생각하고 하루에 30분도 연습을 안했거든요. 시합날은 40년 이래의 더위인데다 20마일 이상 지나면 체온이 식고 염분이 지나치게 나오니 경련이 일어나게 되더군요.”(<동아일보>1964년1월7일)
 
■공업용 피부도포제를 술(양주)로 알고 마시다
더 기막한 것은 역도에서 일어났다. 역도 60㎏급에 출전한 남수일은 이름난 술꾼이었다. 그는 선수단 가운데 최고령 선수였다.

런던행 비행기에서 선수들은 승무원이 주는 조그만 병의 양주를 받았다. 남수일은 이게 웬 떡이냐며 들이킨 뒤 빈병을 가방에 넣었다. 이게 화근이 될 줄이야. 선수촌(초등학교)에 입촌한 남수일은 조사연구원으로 수행한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라디오 중계반 아나운서 민재호와 한방을 썼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손기정의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육포와 대구포 등을 본 민재호가 입맛을 다셨다.
“달도 좋고 안주도 좋네, 여기에 술만 있다면….”

그러자 남수일은 자기 가방에서 3~4병의 술병을 꺼냈다. 병에는 한가득 액체가 들어있었다. 이게 문제였다. 사실 이 액체는 술이 아니었다. 공업용 살리실산 용액이었다. 당시 선수단의 의무담당은 유한철씨였다. 그는 선수들의 근육을 풀어 줄 피부도포제를 사려고 런던의 약품시장을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2차 대전 직후였으므로 영국의 물자사정도 좋지 않았다. 마땅한 제품이 없자 공업용 살리실을 대용품으로 구입해서 선수들에게 나눠주었다.

남수일은 바로 그 용액을 술병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재호가 술타령을 하자 깜빡 술로 착각하고 술병을 내놓았다.
세 사람은 기쁜 마음에 조그만 잔으로 ‘술’을 따라 마셨다. 한데 술맛이 유난히 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살리실산액을 허벅지에 바르면 쏴하고 쏘는 기운이 뒷다리에 미칠만큼 독했다. 더욱이 공업용이었으니 제대로 마신다면 큰 일이었다. 손기정과 남수일은 두번째 잔을 사양했다.

하지만 민재호는 “운동선수들이 뭐 그러냐”고 호기를 부리며 벌컥벌컥 마셔댔다. 큰 일이 일어났다. 손기정과 남수일은 데굴데굴 구르다 화장실에서 모두 토해냈다. 머리가 아파 견딜 수 없었던 둘은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끙끙 앓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후. 괴성이 선수촌을 뒤덮었다. 민재호가 뒤늦게 발작을 일으켜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몸집이 컸던 민재호의 비명은 마치 곰의 울음소리 같았다. 축구·농구·육상선수들 모두가 창졸간에 달려왔다. 공업용 살리실산 용액을 벌컥벌컥 마셔댔으므로 죽지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진통제를 맞은 뒤 새벽 3시가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문제는 다음날 일어났다. 축구가 8강전에서 스웨덴에 0-12로 기록적인 참패를 당한 것이다. 민재호는 그 참사의 소식을 듣자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나 때문이야. 나!”
자신이 살리실산 용액을 마시고 광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축구선수들이 잠을 설쳤다는 것이었다.
“내 추태 때문이야. 난 민족 만역자야!”

급기야 민재호는 벽에 머리를 찧으며 죽어버리겠다고 자해하기 시작했다. 남수일과 손기정은 자해하는 민재호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어떻든 생명을 건진 세사람은 이날을 재생의 기념으로 삼고 의형제를 맺었다. 남수일은 이 소동후 이틀만에 경기에 나섰지만 4위에 그쳤다. 페더급인 남수일이 갖고 있던 공인기록은 335㎏이었다. 하지만 그날 만신창이가 된 남수일은 겨우 307.5㎏을 드는데 그쳤다. 만약 그가 자신의 공인기록만 들었어도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해프닝일 터…. 런던의 64년 전은 이렇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라고 할까.

■최초의 오심 피해자
또 하나 기막한 일이 복싱에서 일어났다.
복싱 플라이급에 출전한 한수안은 준준결승에서 네덜란드의 쿠만을 2회2분만에 KO로 물리치고 4강에 올랐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한수안을 양쪽 고막을 다쳐 고열에 시달렸다.

한수안의 4강 상대는 이탈리아의 반디낼리였다. 한수안은 다음 날 오후 8시가 경기시간인 줄 철썩같이 믿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시간이 오후 5시일 줄이야. 경기시간이 바뀐 것이 한국선수단에게 통보됐지만, 그 사실이 코치와 선수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이같은 사실을 안 한수안은 부랴부랴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아슬아슬하게 경기시간에 닿았다. 하지만 식사도 못하고 여전히 터진 고막 때문에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상대인 반디낼니는 한수안이 강적이라 생각하고 덤비다가 3번이나 파울을 범했다. 하지만 실격이 선언되지 않았다. 아깝게 판정패한 한수안은 이튿날 3~4위전에서 승리, 동메달을 땄다. 당시 선수단의 임원으로 참가한 정상윤(선수단 총무 겸 농구감독)의 회고.

“한수안은 사실은 금메달을 딸 것이었어요. 코리아가 알려지지 않은 핸디캡 때문에 심판의 편견이 우승을 막았죠.‘(동아일보 1964년 1월7일)   
그렇게 보면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이 지긋지긋하게 당한 ‘오심의 시발’이 바로 한수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희대의 판정번복 사태도 일어났다. 남자육상 400m에 출전한 미국팀은 1위로 골인했다. 하지만 심판진은 바통터치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실격판정을 내렸다. 미국팀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심판의 심의는 사진필름까지 동원된 끝에 4일간이나 벌어졌다. 판정은 결국 번복됐다. 오심·판정번복의 역사는 이렇게 시공을 초월해 일어나는 것인가.    

■세계 8강 오른 농구
농구는 예선에서 필리핀(33-35)·중국(48-49)로 졌지만 벨기에(29-21)와 칠레(28-21)를 연파하고 8강에 올랐다. 하지만 8강 본선에서 멕시코(32-43)·우루과이(36-45)·체코(38-39)에 연패하면서 8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금의 남자농구 현실을 보면 그때의 8강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시 올림픽 선수단 총무로서 농구 감독을 겸했던 정상윤은 “후회막급한 사실이 있다”고 술회한다.
“당시 우리 선수들의 팀워크는 물론 컨디션도 매우 좋았어요. 하지만 감독 입장에서 좀 더 완벽을 기한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과욕과 패인을 만든 셈이 됐죠. 연습경기를 한번만 했어도 체력면에서 약화가 없었을 텐데 미련하게도 그것을 되풀이 되풀이 연습시켰으니 우리 선수들의 체력소모가 뻔한 노릇이 아니었겠냐는 데서 지금도 송구함과 안타까운 마음 잊지 않고 있어요.”(<동아일보> 1964년 1월7일)
올림픽 후 런던에서 발행된 올림픽백서는 “한국팀의 기술이 굉장히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단다.           

또 하나의 성과는 잘 알려졌듯이 역도 75㎏급의 김성집이 당당 동메달을 딴 것이었다. 김성집은 이집트의 엘 투니와 같은 합계 380㎏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계체량에서 1.92㎏ 가벼운 김성집이 동메달을 가져왔다. 이 동메달은 한국이 KOREA라는 이름으로 딴 첫번째 메달이었다.

당시 런던올림픽 조직위는 메달집계가 아니라 6위 이내의 입상자까지 점수를 부여했다. 동메달 2개를 딴 한국은 종합점수 13.75점로 참가 59개국 가운데 24위에 올랐다. 동양권에서는 인도(금 1개)에 이어 2위의 성적이었다. 미국(645.5점)과 스웨덴(347점), 프랑스(224점)가 1·2·3위를 차지했다.

■“지탄 받은 선수단”
올림픽이 끝나자 책임론과 문책론이 거세게 일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불과 2년 남짓.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단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컸다. 정식감독을 보내지 않은 조선농구협회과 조선축구협회는 잇달아 ‘죽을 죄를 졌다’는 내용의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지도부 총사퇴를 결의했다.


“심지어는 어떤 감독은 일 개인에게만 지도를 하였으므로 선수는 선수대로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어찌 우승을 바랄까보냐? 집안에서 새는 박아지, 들에서도 샌다는 격언도 있거니와….”(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

경향신문은 “그나마 이런 협회들은 반성하는 의미에서 사과하는 것이니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평가했다.(경향신문 1948년 8월22일) 그러면서 왜 올림픽 선수단이 꾸짖음을 당해야 한는 지를 조목조목 꼽는다.
“우리 겨레가 1억5000만원의 올림픽 후원권(복권)을 샀다고 하여 뽐내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좋은 기술이 있었음에도 합심이 없어졌다는데 죽일 놈이니 살릴 놈이니 하는 것이다.”(경향신문 1948년 8월22일)
또 하나 선수단이 지탄을 받은 대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8월13일 UP조선통신의 보도 때문이었다.

■“딴스(댄스)에 빠진 선수단”
“그들은(한국선수단) 아침부터 밤늦도록 행복을 누리고 있다. 연습이 없을 때엔 ‘딴스(댄스)’를 하고 소학교(선수촌으로 쓰던 곳)의 피아노를 치고 또 물건을 사러 저자로 나가기도 한다. 다만 그들이 조용할 때란 식사 때 뿐이다.~이젠 제법 이곳 소녀들과 더불어 오래도록 딴스를 즐기고 있으며 그들의 일부분은 고국으로 가지고 갈 모사(毛絲)를 희망하고 있다.”

동메달리스트 김성집이 BBC방송를 통해 “국기게양식 당일밤 우리 일행은 정신통일이 못되어 매사에 큰 지장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것도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같은 소식은 참패 후 그 원인조차 모르고 있던 국내동포들에게 불타는데 부채질격으로서 큰 분격을 주었다. ~이와같은 일이 일이 설사 있어도 한번쯤 관대하게 용서하여 차후에 이런 일이 없도록 잘 지도하는 것도 사랑에서 용솟음치는 정리일 것이다.”(경향신문 8월24일자)

이같은 보도가 과장됐거나 왜곡됐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국내여론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런던대회에 참석한 정상윤은 선수단이 ‘댄스에 빠졌다’는 보도에 이와같이 해명했다.
“영국에서는 우리의 구청장 비슷한 사람이 대회가 끝나자 돌아가며 파티를 열어주었어요. 우린 농구선수가 영어도 제일 나은데다 ‘댄스’도 할 줄 알아 파티에 보냈죠. 그런데 그곳 UPI기자가 코리아는 야만국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지 영어도 하고 ‘댄스’도 한다고 제깐엔 신기해서 쓴 것이 와전된 것 같아요.”
뭐, 판단은 독자에 맡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고자 올림픽에 크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의 실망은 컸을 것이다. 어쨌거나 런던의 64년 전 모습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같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한국역사전1-순간의 힘을 모아>, 조동표, 국민체육진흥공단, 1998
<스포츠영웅, 영원한 올림피언 김성집>, 고원정, 대한체육회, 2012
<KOC 50년사>, 대한올림픽위원회, 1996
<올림픽정치사>, 허복·오동섭, 1985
<올림픽인간드라마>, 오도광, 기시모토 겐·가와즈 히데오, 고려원, 1985
<한국농구 80년>, 대한농구협회, 1989 
<불멸의 혼 손기정>, 이태영, 대한체육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