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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삼정승 배출한 성균관 1582학번

“아이고. 벌써 49년이 흘렀네. 그 때(임진년) 태어난 자들도 백발이 되었을 텐데….”  
 1630년 4월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노인 12명이 관인방(寬仁坊·관철동) 충훈부(忠勳府) 건물로 속속 모였다. 손에 손에 술 한 병씩 든 채….
 이들은 1582년(임오년) 사마시(생원·진사시)에 합격했던 동기생들이었다. 이른바 ‘(15)82학번 동기모임’이 열린 것이다. 원래 동기생 수는 200명이었다. 하지만 합격한 지 48년이나 지났으므로 많은 동기들이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재경(在京) 동문들만이 참석대상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2명 만이 모인 것이다.
 이조판서 정경세가 남긴 글을 통해 이날 동기모임의 자초지종을 읽어보자.(윤진영의 <만남과 인연의 추억-임오년·1582년>에서)  

48년만에 만난 성균관 1582학번의 동기모임. 품계에 따라 앉아있다. 가운데 4명은 정1품 관직에 있었던 윤방, 오윤겸, 이귀, 김상용 등이다. 오른쪽 2명은 정2품인 이홍주와 정경세다.(출처|<만남과 인연의 추억-임오년(1582년) 사마시 입격동기생들의 방회도>,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 발행 "우복 정경세전" 도록)

■1582학번’, 49년 만에 동기모임 열다
 동갑내기 친구인 이배적(중추부 경력)이 정경세(이조판서)을 찾아왔다.
 “자네 이준(동기생)이가 삼척부사로 발령 받았다는 소식 들었나? 어떤가? 우리 임오년(1582년) 사마시 동기생들 가운데 무탈하게 서울에 살고 있는 자가 12명이나 되니 한번 모이는 것이…. 마침 돈녕부사인 윤방에게도 알렸더니 흔쾌히 좋다고 하더군. 영상은 나보고 연락책을 하라고 하더군.”
 “암. 당연히 모여야지.”
 그러니까 삼척부사로 떠나는 이준(李俊·71)의 송별회를 겸한 자리로 방회, 즉 동기모임을 조직한 것이다. 쟁쟁한 동기생들이었다.
 이준 뿐 아니라 돈녕부사 윤방(68)·의정부 영의정 오윤겸(72)·병조판서 이귀(74)·예조판서 김상용(70)·경기관찰사 이홍주(69)·이조판서 정경세(68)·용양위부호군 윤흔(67)·한성부좌윤 류순익(67)·첨지중추부사 윤환(75)·중추부 경력 이배적(75)·용양위사정 김두남(71) 등이 참석했다. 모두 종 4품 이상의 품계를 지닌, 출세한 동기생들이 모인 것이다.
 1582년 입격 당시 최연소자는 19살이었던 윤흔이었고, 최고령자는 27살의 이배적이었다. 또한 윤방과 윤흔은 형제간이었다. 모인 12명 가운데는 정경세의 입학성적이 가장 좋았다. 그는 약관 20살에 생원시에 1등 2위를 차지했다. 정경세는 4년 뒤인 1586년(선조 19년), 문과 알성시에 24살의 나이로 을과 2위를 차지했다.

 ■밴드없고, 도우미 없는 간소한 술자리
 이들은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며, 밤늦도록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셨다. ‘밴드(악사·樂師)’나 ‘도우미(무녀·舞女)’는 부르지 않은 간소한 술자리였다. 이들은 이윽고 헤어질 때가 되자 장탄식 했다.
 “이제 세상에 남아있는 동기생들이 얼마 없네 그려. 새벽 하늘의 별 같이 사라지네.(落落如曙天星矣)”
 “다행히 서울에 살아있어도 종일 바쁘니…. 오늘과 같은 날이 백년 가운데 얼마나 되겠는가.”
 “자 어떤가. 모임을 기념해서 그림을 그리고, 성명을 나란히 쓰고 해와 달을 기록해서 바쁜 와중에서도 한번씩 펴본다면….”
 “아무렴. 그러세.”
 동기생들은 이날의 모임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 ‘방회첩(榜會帖)’이었다. 이것이 ‘임오사마방회도’이다. 방회도엔 모임 장면을 그린 그림 한 폭과 각자의 시문, 참석자들의 명단을 적어 넣었다.
 또한 모임의 과정을 기록한 서·발문도 포함됐다. 지금으로 치면 기념사진 등을 담은 ‘동기회 홈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이 방회첩은 참석자들이 하나씩 나눠 가졌다. 

 ■동기회 홈페이지
 그런데 ‘1582학번’들은 4년 뒤(1634년·인조 12년)에도 두번째 동기모임을 열고, 또 하나의 방회첩을 만들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상용의 사위인 장유(1587~1638)가 장인의 지시를 받고 쓴 것이다.
 두번째 동기모임은 병조의 옛 관아에서 열렸다. 모임에는 8명이 참석했다. 4년 전 모임멤버였던 이귀·정경세·류순익·윤환·이배적 등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동기들이 장탄식했다. 방회첩 서문에 이날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정리돼있다.
 “사마시란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이고…. 그 가운데서도 과거에 합격하기란 힘들고…. 과거에 합격했다 해도 당상관 이상의 관원이 되기도 힘든데….”
 “그 뿐인가. 고위관원의 반열을 뛰어넘어 정승자리에 오르기란 더더욱 힘든게 아닌가.”   
 “모두 호호백발이네. 200명 가운데 살아남은 이가 10분의 1도 안되고….”
 “그나마 서울에 있는 이는 고작 8명이야.”
 “그나저나 이 여덟 사람이라도 이렇게 한 방에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 창안백발(蒼顔白髮)의 모습으로 하룻밤의 환락을 마음껏 즐기다니…. 노경에 보기드문 일이 아닌가.”  

4년 뒤인 1634년에 열린 동기회를 그린 방회도를 보면 달라진다. 4년 전 4명이었던 가운데 상석에 3명이 앉아있다. 이귀가 1년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른쪽에는 정경세가 타계하는 바람에 이홍주만 자리를 지켰다.

■막강한 동기들

 ‘1582동기회’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모인 8명 가운데 3명이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정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4년 전인 1630년, 돈녕부사와 예조판서였던 윤방과 김상용이 영의정과 우의정에 올랐으니 말이다. 일흔살이 넘는 고령이었는데도…. 또 4년 전 영의정이던 오윤겸은 좌의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학번’에서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3정승을 동시에 배출했으니 동기회의 위세는 다단했을 것이다. 방회첩 서문을 보자. 
 “같이 합격한 이들 가운데 정승이 하나 나오기도 힘든데…. 우리는 셋이나 동시에 정승이 되어 지금 이 모임에서 자리를 나란히 하고 있네 그려.”
 “그렇지 아마도 전무후무한 희한한 사건일 것이야.”
 “그래. 나라의 삼정승이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 가운데 똑같이 나와 지금 한 방에서 회동하고…. 또 모두들 높은 수명을 누리고들 있으니….”
 “아!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지. 우리 동기들은 가히 인재의 복록(福祿)이야. 아니 그런가?”
 “아무렴 아무렴.”

 ■국무총리(영의정)와 9급 공무원(참봉)이 함께 술 마시다
 아무리 동기모임이었지만 술자리의 서열은 철저했다. 품계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졌다.
 하지만 술잔을 기울일 때는 격의가 없었다. 이날 모임에는 4년 전 모임에 참석한 12명 가운데 6명이 세상을 따나는 바람에 불참했다. 대신 4년 전 모임에 불참했던 박종현과 연사의가 새로이 참석했다.
 그런데 연사의의 직책은 가장 말직인 ‘참봉’(9급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윤방) 등 고관대작 동기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술잔을 나눴다.
 첫 모임에 불참한 이유가 혹 말단공무원이라는 신분을 스스로 의식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랬다가 두번째 모임에는 “꼭 나오라”는 동기회장의 권유 덕분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다만 1630년과 1634년의 방회도를 보면 아무리 동기라지만 품계에 자리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즉 1630년 방회도에는 건물 중앙에 앉은 4명은 윤방·오윤겸·이귀·김상용이다. 4명 모두 정1품의 품계에 해당되는 사람들이기에 건물의 북쪽인 상석이 앉은 것이다. 다음 오른쪽에 앉은 이들이 정2품인 이홍주와 정경세이다. 두번째 상석인 동편 벽쪽인 것이다. 또한 그 맞은 편인 왼쪽에는 종2품부터 정4품까지 6명이 앉아있다. 전별연의 주인공인 삼척부사 이준의 자리는 세번째이다. 

1630년 동기회에서 정경세가 작성한 방회첩 서문. 모임의 과정과 술자리 모습이 담겨있다. |<우복 정경세전> 도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간

■4년 만에 재회한 동기들
 그런데 4년 뒤인 1634년에 작성된 방회도를 보면 달라진다.
 먼저 건물 가운데 상석에 1명이 빠진 3명이 앉아있다. 4년 전에 상석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이귀가 1633년 별세했기 때문이다. 또 오른쪽에는 정경세가 사망했기에 이홍주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4년 전  자리를 지키고 있던 6명 가운데 류순익·윤환·이배적 등 3명이 이미 고인이 됐다. 또 삼척부사 이준도 어쩐 일인지 불참했다. 그 빈 자리를 박종현과 연사의가 채웠다. 
 어쨌든 52년 전 ‘합격동기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분의 차이를 넘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사마시(소과)에 합격한다고 해서 관직에 나서지는 못했다.
 다만 ‘성균관 입학’이라는 자격을 받는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입동기생’이라면 맞는 표현일까. 이들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뒤 대과인 문과(文科·지금의 행정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사마시는 벼슬길(대과 합격)의 첫 관문인 셈이다.

 ■‘고시동기’(대과)보다 더 각별했던 ‘대학동기(사마시)’
 하지만 ‘소과 합격자’는 국가고시를 통해 사족(士族)의 지위를 공인받는 신분이었다. 벼슬길에는 올라가지 못해도 평생을 ‘생원’ 혹은 ‘진사’의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었다.
 양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바로 생원·진사였던 것이다. 또한 별다른 배경이 없는 이들에게 ‘사마시 동기’는 관직생활을 위한 든든한 인맥이었다. 동기생들은 형제관계에 비유될 만큼 굳건한 결속력을 다졌다. 하수일(1553~1612)의 ‘삼청동방회서(三淸洞榜會書)’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부탁할 친구도, 받아들여 줄 사람도 없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급제한 자를 게시하는 방(榜) 위에 걸리는 이름들은 한평생을 벼슬길에서 형제 사이처럼 지낼 사람들이다. 금세 만났지만 그 정은 마치 오래 사귄 친구 같고, 처음 모였는 데도 모든 이의 각오는 쇠를 자를만큼 굳고 든든하다.”
 그런데 대과, 즉 33명을 뽑는 과거급제자들의 동기회보다는 200명이 선발된 사마시 동기회의 결속력이 더 끈끈했다.
 아무래도 ‘대과동기’는 출세경쟁를 위한 ‘연줄’의 의식이 강했을 것이다. 반면 관직으로 나가는 첫 관문을 함께 통과한 ‘사마시동기’들의 인연은 더 각별했을 것이다. 요즘도 고위공무원 인사가 날 때마다 고시 몇기니, 아니 더 나아가 ‘고소영’이니 ‘성시경’이니, 하면서 온갖 지연, 학연, 혈연을 동원하면서 입방아를 찧는다. 그런 마당에 1582학번 동기처럼, 만약 같은 고시동기에서, 혹은 같은 대학, 같은 고교 기수에서 3정승이 나온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됐을 것이다.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