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기행

유엔군 화장터, 한 줌 재로 스러진 젊은이들

   

1940~50년대 육체파 여배우였던 제인 러셀. 오성산 인근의 고지가 제인러셀의 가슴을 닮았다해서 '제인러셀' 고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피의 의미

 한국전쟁은 국제전쟁이었다.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과 중국, 소련, 그리고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16개국 등 20개국이 직접 참전했다.
 차마 제3차 세계대전을 치를 수 없었던 동서 양진영이 한반도에서 ‘제3차대전의 대체전’을 치른 것이다. 전쟁의 양상은 특이했다. 1년 여의 혈전 끝에 교착상태에 빠졌다.(1951년 6월) 전선은 지금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 공산측으로서는 1951년 두 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벌였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소련이 약속한 60개 사단분의 전투장비와 보급품도 도착하지 않았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와의 반전여론과 동맹국들의 휴전압력, 그리고 중국군의 강력한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전쟁수행능력 등을 절감했다. 특히 한반도에 힘을 집중, 전선이 확대될 경우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럽이 소련의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확전은 피아간 불가능해졌다.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양측은 휴전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양측의 지루한 줄다리기는 2년 이상 이어졌다. 그동안 전쟁은 고지쟁탈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1127일 간의 전쟁기간 중 764일, 즉 3분의 2 이상의 기간을 종심 20㎞ 내외 전선의 고지에서 치르는 희한한 전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남북한이었다, 우리 측 전사에 따르면 한국군 31만명, 북한군 60~80만명의 인명피해를 냈다니까….
 그러나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든 18개국 젊은이가 뿌린 피는 상기해보자. 이역만리 머나먼 한반도에서 숨졌거나 부상을 당한 젊은이는 유엔군 16만명, 중국군  97만명에 이른단다. 이들이 뿌린 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기 연천 미산면 동이리에 있는 유엔군 화장터.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역만리 전장에 와서 값진 피를 흘렸다. |김창길 기자

 ■포로가 없었던 파병군
 아프리카에서 온 에티오피아군 1200명은 누구였을까.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보위하는 근위대에서 뽑힌 충성스런 병사들이었다.
 아디스아바바 인근 한국지형과 닮은 곳에서 훈련까지 마친 부대는 가그뉴(Kagnew·강적을 궤멸시킨다는 뜻)라는 부대이름으로 파병됐다. 특이한 점은 참전기간 중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는 것이다. 충성스런 황제의 군대에서 포로란 있을 수 없었기에 포로수가 0이었다는 것이다.
 필리핀 군은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의 참전으로 유명하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라모스 소대장(중위)이 에리고지(연천 역곡천 인근의 작은 고지) 제3벙커 4m까지 다가섰다. 그러나 갑자기 중국군이 소총을 마구 쏘며 뛰쳐나왔다. 놀란 라모스 중위가 카빈총을 난사했고 중국군 3명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한국전쟁사> 제11권 ‘유엔군 참전’)
 라모스 뿐 아니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남편인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도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리핀군의 참전 때는 무려 6만명의 필리핀 국민들이 파병군을 배웅했다고 한다.
 여단급(5000명)을 파병한 터키군의 경우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실탄훈련도 하지 못한채 파병됐고, 언어소통 문제로 한국군과 북한군을 제대로 구별할 수도 없었다. 또한 음식도 맞지 않았다. 1950년 11월 군우리 전투에서 여단의 전력이 사실상 와해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1951년 1월 금량장 전투에서 포로되기를 거부, 착검한 채로 돌격하는 용맹성을 발휘했다고 한다. 

유엔군 화장터임을 알려주는 굴뚝이 남아 있다. 유엔군 젊은이들이 한 줌의 재로 스러진 곳이다.|김창길 기자   

■‘희생없인 승리도 없습니다.’
 태국군은 ‘리틀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으며 연천 역곡천 인근의 ‘포크찹 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사는 “태국군이 1952년 11월부터 세 번에 걸친 중국군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쓰고 있다. 대대급을 파견한 프랑스는 몽클라르 대대장(중령)의 일화가 유명하다. 몽클라르는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 장군으로 종군한 뒤 종전하자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정부가 대대급으로 파견부대를 보내자 계급을 낮춰 중령으로 복귀, 대대장이 되었다.
 벨기에의 경우 전 상원의원이자 당시 국방장관이던 모레안 드 멜론이 소령으로 출전, 연락장교를 맡기도 했다.
 남북한을 제외하고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쪽은 미국과 중국이었다. 연인원 180만 명을 파병한 미국은 14만 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2차 대전의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존 육군 소령)을 비롯해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다. 이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당했다.
 이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의 아들(지미 공군 중위)이 폭격기를 조종하며 출격했다가 실종됐다, 참모들은 수색작전을 펼쳐 사령관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아버지 밴플리트는 이렇게 말했단다. “다른 작전이 내 아들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또 어떤가. 중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순망치한(脣亡齒寒) 호파당위(戶破堂危)’, 즉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고 현관문이 깨지면 안채가 위험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참전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마오안잉·毛岸英)도 자원 참전했다가 유엔군의 소이탄 공격에 전사했다. 아들의 사망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슬픔을 감춘채 말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이니 그냥 한반도에 묻어둡시다.”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 피바다를 이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제인러셀 고지 아시나요”
 지루한 고지전 속에서 전투의 성격이나 특징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고지의 이름이 쏟아졌다.
 티본스테이크 처럼 생겼다고 ‘티본고지(T-boneㆍ연천)’, 살이 붙은 돼지 갈비뼈를 닮았다는 ‘포크찹 고지(Porkchopㆍ연천)’, 당대 미국의 유명한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는 ‘제인러셀 고지(Jane Russellㆍ김화 오성산 기슭)’….
 ‘백마고지(White Horse hill)’란 이름을 보자. 십자포화로 벗겨진 고지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밖에 집중포화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철원)’, 대머리처럼 벗겨졌다는 ‘불모고지(Old Baldyㆍ연천)’, 저격 당하기 십상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Sniper Ridgeㆍ김화)’, 그리고 처절한 전투로 피바다가 됐다는 ‘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ㆍ양구 북방)’,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스런 전투가 이어졌다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양구 북방)’ 등은 전쟁의 참화를 웅변해주는 명칭들이다.

 

 ■허무한 고지전투
 그러나 처절한 고지 전투의 끝은 허무 그 자체였다. 예컨대 ‘피의 능선’ 전투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T R 페렌바크는 평가했다.
 “이 보잘 것 없는 둥근 언덕 3개(피의 능선)을 차지하려 4000명이 넘는 아군 병사가 묵숨을 바쳤다.”
 42일간 피아간 2만~3만7000명의 인명피해를 낸 ‘저격능선’ 전투를 평가한 우리 측 전사는 어떤가.
 “저격능선이라는 적의 전초 하나를 뺏으려 그렇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어야 했던가.”(<한국전쟁전투사-14.저격능선전투>)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헛된 피를 뿌린 것일까. 혹 그들의 희생 덕분에 세계는 제3차대전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천의 한 귀퉁이, 유엔군 화장터에 다시 선다. 누군가 굴뚝 위로 녹슨 철모를 살며시 얹어 놓았다. 누구의 넋이 찾아와 그렇게 앉은 것인가.    
 쏜살같이 다가오는 땅거미 사이로 한줄기 바람이 훠이훠이 진혼곡을 불러댄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