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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선조실록-수정실록, 어떤 역사였나

 

요즘 역사가 뜨거운 화두에 올라있는 때입니다. 이번 주는 그래서 정권에 따라 역사서술을 바꿨던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한번 다뤄보겠습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 남긴 흔적….’ 뭐 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선조실록을 수정하게 된 것은 첨예한 당쟁의 결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말은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 보태자면 선조실록은 애초부터 부실덩어리였다는 점도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사관들이 사초책을 불태우고 줄행랑 쳐버리는 바람에 선조 즉위년(1567)~임진왜란 직전(1592년 4월) 사이 25년의 역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개인기록들을 모아 겨우 실록을 만들었지만 부실덩어리라는 오명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광해군대에 정권을 잡은 대북파가 사필을 잡고 역사를 농단하면서 더욱 누더기가 됐습니다. 그러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수정의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역시 정권의 입맛대로 역사가 바뀌는 그야말로 악순환의 고리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 있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당대의 역사가들은 원본인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고, 수정본과 함께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들의 위대함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경향신문 논설위원

 

 “류성룡은 좁고 굳세지 못해 이해가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못했다.…재상의 그릇이 부족한 인물이다.”(<선조실록>) “실록 편찬자가 비방하고 배척했다. 류성룡은 나라걱정을 집안일처럼 했다.”(<선조수정실록>)
“윤두수는 참으로 염치를 모르는 비루한 사내다.”(<선조실록>) “사신이 허위로 날조해서 모함하느라 급급했다.”(<선조수정실록>)
“정철은 편협하고 망령되어…원망을 자초했다.…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선조실록>) “권간이나 적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승 노릇을 1년 남짓 했고, 이산해·류성룡 등 다른 정승들도 있는데 어떻게 권세를 부린단 말인가.”(<선조수정실록>)
“정언 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 간쟁하는 풍도가 있었다.”(<선조실록>)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실록을 쓸 때 스스로를 거리낌없이 칭찬했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선조수정실록>)
“기자헌은 도량이 넓고 덕망이 있었다.”(<선조실록>)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입맛대로 스스로를 칭찬했으니 주벌(誅罰)을 가해도 모자라다.”(<선조수정실록>)
선조~광해군대를 풍미했던 이들의 인물평이다. 이토록 상반될 수 있단 말인가. <선조실록>은 류성룡과 윤두수, 정철을 부족하고 편협한 사람이라 폄훼했지만, <선조수정실록>은 “그것은 전적으로 <선조실록>을 쓴 사관들의 잘못된 서술”이라면서 긍정평가를 내렸다. 또 <선조실록>이 ‘좋은 사람들’이라 극구 칭찬했던 인물들을 두고 <선조수정실록>은 ‘스스로 역사를 포장하려 했던 파렴치한’이라 손가락질 하고 있다. 심지어 주벌을 가해도 시원치않다고까지 저주했다.
대체 왜 이런 상반된 평가가 일어나게 된 것일까. <선조실록>은 무엇이고, <선조수정실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34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된 <선조수정실록>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선조실록>은 적신(賊臣)의 괴수(魁首)에 의해 편찬되어 부끄럽고 욕됨이 심합니다.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1623년(인조 1년) 지사 이정귀가 광해군대에 편찬된 <선조실록>의 수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대북파인 기자헌과 이이첨이 중심이 되어 찬술한 <선조실록>이 객관성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군 1년)부터 이항복과 이정구, 신흠 등이 편찬작업을 펼쳤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로 이항복 등 3인이 축출됐다. 이후 <선조실록>의 편찬은 기자헌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주도하게 됐다. 이정구가 주장한 ‘적신의 괴수’란 바로 대북파 기자헌과 이이첨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어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가자 수정작업에 나선 것이다.
사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대에 처음 편찬 작업에 나설 때부터 부실논란을 빚었다. 왜냐면 실록 편찬을 위한 원자료인 사초가 임진왜란 와중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1609년(광해군 1년) 실록 편찬위원이던 신흠은 <상촌휘언>에서 ‘사초실종’의 내막을 전하면서 분통을 터뜨린다.
“선조 즉위년(1567년)~임진왜란 직전(1592년 3월)까지의 역사기록이 깜깜한 채 징험할 수 없게 됐다.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면서 사관인 조존세·박정현·임취정·김선여 등이 사초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상촌휘언>)
신흠은 당시 실록청 총재관(편찬위원장) 이항복에게 “잃어버린 25년의 사적을 그날그날의 일을 다 찾아 기록하자면 10년이 걸려도 완성될 수 없을 것”이라 하소연했다. 그러나 편찬위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명공거경(名公巨卿·고위관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알려져 있으니 이들의 행적을 ‘열전’처럼 기록하면 당시의 사적은 모두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초를 잃어 임금의 행적에 따라 서술할 수 없지만 신하들의 <열전> 형식을 통해서라도 <실록>을 편찬하자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편법이 아닐 수 없었다.
설상가상의 사건이 벌어졌다. 앞서 밝힌대로 계축옥사로 이항복 등이 쫓겨나고 기자헌 등 대북파가 나서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남아있는 <선조실록> 221권 가운데 ‘사초실종’ 25년의 기사는 불과 26권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들도 변란 초기 기록이 부실할 뿐 아니라, 조잡하고 당파에 얽혀 불공정한 기록들이 많다. 따라서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조실록>.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몽진길에 올라있던 사관 4명이 사초를 몽땅 불태운 뒤 사라져버렸다. 이에따라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가장 허술한 실록이 되고 말았다.

■“선조실록은 왜곡사입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선조실록>은 인조반정에 따른 대북파의 몰락으로 수정의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정권교체가 직접 원인이 됐지만, 사실 대북파의 편협하고 일방통행식 역사서술도 <수정실록> 편찬의 빌미가 됐다. 역사가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대북 정권의 입맛대로 자파는 자화자찬하고, 다른 파에 대해서는 비방을 일삼는 서술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당색을 떠나 인망이 두터운 한준겸·이덕형·이현영 같은 인물들과, 류성룡·정구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열의 성혼·이항복·윤두수·신흠·이정귀와 김상헌 등을 닥치는 대로 비방했다. 특히 이정귀의 경우 폐모론에 반대해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다시 광해군에 의해 재등용될 정도로 외교관으로서의 문명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물에게 <선조실록>은 “사부(辭賦·한시)에 식견이 없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기자헌·이이첨 등 자파 인물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군자로 표현했으니 올바른 역사서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선조실록> 편찬은 계축옥사와 폐모론이 진행되는 무렵 지지기반이 좁아지던 대북 정권의 실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대북정권의 고립을 촉진시켰다. 그랬으니 정변(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수정의 논의가 다시 거세게 인 것이다.
<선조실록>은 인조반정 뒤 ‘사실을 왜곡시킨 역사’, 즉 무사(誣史)라는 혹평을 들었다.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하지만 <선조수정실록>의 편찬도 녹록치않은 작업이었다.
이정귀 등의 상소로 추진됐지만 이괄의 난(1624년)과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 병란이 겹치는 바람에 지지부진했다.
그 와중에 폐주의 역사라는 <광해군일기> 편찬이 더 급하다고 해서 <선조수정실록> 편찬은 뒷전으로 밀렸다. 광해군 초기의 역사를 기록한 사초가 이이첨 등의 영향을 받아 왜곡됐으니 이 또한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현안으로 꼽혔던 것이다. 반정세력으로서는 갖가지 병란을 겪으면서 실추딜대로 실추된 ‘반정의 정당성’을 먼저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정귀의 문제 제기 후 18년이 지난 1641년(인조 19년) 대제학 이식이 다시금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문제를 제기했다.
“잇달아 변란을 겪으면서 사초는 물론 민간에 떠도는 야사와 각 가문에서 전하는 서책들이 거의 모두 인멸되었습니다. 또 옛 일을 아는 신하들이 죽었거나 늙어서 조정에 있는 자는 한 두 명도 안 됩니다. 만약 다시 수년을 지나고 보면 신들과 같은 무리들도 점차 죽게 될 것입니다.”(<인조실록>)
<선조 수정실록> 편찬은 이식의 상소로 급물살을 탔다. 처음에는 편찬의 방법론 상에 논쟁이 벌어졌다. 최명길 등은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했듯이 수정작업은 이식이 전담하게 하고 실록청도 이식의 집에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말하자면 사마천의 <사기>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사관 1명이 책임을 지고 역사서를 일관되게 찬술하는 편이 효율성면이나 비용절감 측면에서도 낫다는 것이다.

 

경기 양평군에 있는 이식의 사당인 택풍당이다. 이식은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원본인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았다.

“역사는 반드시 의논해서 공론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사편찬을 사사로이 논의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그것과 조선의 실록은 다릅니다. <자치통감>은 전조(당나라)의 역사였습니다.”(<인조실록> 1641년 4월6일)
이식은 “역사는 홀로 담당해서는 안될 일”이라면서 “절충하고 필삭할 일은 마땅히 함께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식은 역사서술이 개인의견이나 당론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비난을 피하려 한 것이다. 수정작업이 공론의 지지를 받으려면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통한 필삭, 즉 공적인 논의구조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예조 역시 신중한 견해를 밝혔다.
“오로지 태사(사관)에게 맡기면 편찬작업이 수월할 겁니다. 하지만 선왕의 역사를 한사람의 견해에 맡겨 개인 집(사가)에서 찬술하게 하면 후세의 공론에 맞더라도 당사자인 신하는 미안스러운 마음일 것입니다.”
논란 끝에 이식의 주장이 가납되어 <선조수정실록>은 사관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공론에 따라 진행됐다. 빈 관사를 정해 편의를 제공하고 전국 팔도의 감사에게 사관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사초와 야사를 고을별로 수집하여 올려 보내도록 했다.  
“춘추관이 아뢰었다. ‘이식이 감히 집에서 홀로 감당해 낼 수 없다고 하여 이렇게 사양하고 회피하는 것은 사리상 당연합니다. 한 군데 빈 관사에서 동료들과 회의하여 산정(刪定)한다 해도 비용이 더 들지는 않습니다. 그의 상소대로 가능한 한 편의를 제공해 속히 완수토록 하소서.’”(<인조실록> 1641년 5월7일)
수정작업을 맡은 이식은 검열 심세정과 함께 무주 적상산 사고에 있는 선조실록 가운데 잘못된 곳을 기록한 뒤 따로 <실록담초> 1책을 만들었다. 춘추관에서 수정실록을 찬술할 때 참고하려던 것이었다. 이식은 선조 시대의 역사 가운데 1596년까지의 개수작업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식의 파직 등 갖가지 사건이 터져 수정작업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1657년(효종 8년)이 되서야 마무리됐다. 인조 원년(1623년)에 시작된 편찬작업은 무려 4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주묵사 정신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편찬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수정실록>을 제작하면서 잘못된 오욕의 역사라고 지목되어 타도대상으로 삼았던 <선조실록>을 폐기하거나 훼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수정본을 제작한 이식과 채유후의 분명한 역사관을 평가할 수 있다.
이식이 염두에 둔 수정실록의 전범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주묵사(朱墨史)> 였다. 주묵사란 무엇인가. 중국 송나라 때 사관 범충이 <신종실록>을 수정하면서 썼던 기법을 일컫는다. 즉 원문은 검은 글씨로, 뺄 것은 노란 글씨로, 새로 삽입하는 것은 붉은 글씨로 썼다. 이것을 세간에서는 수정하는 대목의 역사를 붉은 글씨로 썼다 해서 ‘주묵사’라 했다.(<송사> ‘열전 범충전’)
물론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은 주묵사를 따라하지 않고, 그 정신만은 되살렸다. 먼저 이식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을 주장하면서 언급한 내용을 보라.
“야사나 각 가문의 기록을 수습해서 절충하고 첨삭해서 사고에 ‘함께 보관하는 것’은 ‘주묵사’가 남긴 뜻입니다.”
또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한 채유후의 말은 더 분명하다.
“역사기록에는 잘못된 곳이 많기 때문에 갖가지 수정서 및 해석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으니 송나라 범충의 역사서(주묵사)가 그것입니다.…수찬한 실록은 신구본을 모두 보존하여 이 주묵사처럼 참고하도록 하였습니다.”(<선조수정실록> 후기 및 1657년 10월5일조)

송나라 범충의 <주묵사> 역사서술의 교훈에 따라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함께 봉안해야 한다고 언급한 채유후.

■그들은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이식과 채유후는 잘못된 역사를 고쳤다고 해서 원래의 역사서를 폐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이 ‘주묵사’의 교훈이라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잘못된 역사서술을 고친다면서 수정서를 애써 만들어 놓고 예전의 ‘그 오욕의 역사서’를 폐기하지 않았던 정신….
이식과 채유휴의 언급대로 ‘원본과 수정본을 함께 남겨둠으로써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역사가의 정신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미심쩍고, 잘못된 내용이라도 사관의 기록은 삭제하지 않고 남겨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역사관을 상징하고 있다. 후세인들은 이식과 채유후 같은 역사가가 함께 남긴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상반된 내용을 읽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것이 진짜 역사이자, 진짜 역사가의 자세이다. 이 참에 이식과 채유후가 남긴 한마디를 전해본다.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이식)
“무고되고 모욕 당한 사실을 일일이 거론하여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채유후)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