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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조선의 임금들도 순식간에 잿더미 되다

그랬으니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진의 제작은 대개 3종류로 나뉜다.
임금의 생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도사(圖寫)와, 임금의 사후에 그리는 추사(追寫)가 있다. 또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됐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할 경우 기존본을 토대로 그려내는 모사(模寫)가 있다.
어진을 제작하려면 우선 임시 관청인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는 임금의 얼굴을 직접 그리는 어진화사였다. 대신들이 당대 초상화를 가장 잘 그린다는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았다. 때에 따라서는 시험을 거쳤다.

예컨대 1713년(숙종 39년) 숙종 어진을 도사할 때 당대 내로라하는 화가들을 추천받아 모아놓고는 각각 초상화 초본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렇게 선발된 6~13명의 어진화사들은 또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화가가 집필화사 또는 주관화사라 했다.

또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임금 몸체를 담당하는 동참화사와 채색 때 일을 돕는 수종화사가 있었다. 또 이들을 도울 구실아치 장인, 표구사인 첩장, 바느질 노비인 침선노 등이 있었다. 

영조의 연잉군 시절인 1714년 그린 초상화. 다소 나약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사대부 보고 그림을 그리라고요?” 
전문화가들이 그리는 초상화는 당대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난 사대부들이 감수하는 과정도 있었다.

정조시대를 풍미한 표암 강세황이 바로 그림에 능한 대표적인 사대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분이 미천한 전문화가들이 어용, 즉 하늘 같은 임금의 얼굴을 보고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떨리는 일이었겠는가.
영조 때 이런 일이 있었다. 1748년(영조 24년) 영조 임금의 어진을 그리던 화가들이 임금의 얼굴을 감히 우러러보지 못한데다 너무 긴장을 한 탓에 자주 실수했다. 영조는 “모발 하나라도 같지 않게 되면 이것은 화가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나의 불효라 할 수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대신들은 사대부인 조영석을 거론했다. “조영석이 그의 스승인 이희조의 초상화를 기막히게 그렸다”면서 “조영석에게 주상의 초상화 1본을 맡기면 어떠냐”고 제안한 것이다. 영조도 맞장구 쳤다.
“그래. 조영석이 그의 형 조영복을 그린 초상화를 고인도 봤다네. 과연 실물과 너무도 흡사했어.”
영조는 당장 조영석을 불러 ‘한번 그려보겠느냐’고 명을 내렸다. 그런데 뜻밖에 조영석은 딱잘라 “아니된다”고 거절했다.
“<예기> ‘왕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예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고향을 떠나 사대부의 반열에 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아무리 용렬하고 비루하지만 어찌 기예로 임금을 섬기겠나이까. 조정에서 도화서를 설치한 뜻이 무엇입니까. 어진을 제작하려고 설치한 것 아닙니까. 저에게까지 집필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임금의 명령을 한마디로 일축한 것이다. 조영석은 ‘그림은 천한 직업인데 사대부인 나더러 그리라는 거냐. 그리는 못한다’는 것이다. ‘사대부더러 그리라고 하면 도화서는 뭐하러 설치했냐’는 것이다. 영조가 “그대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했고 대신들도 “조영석의 거절이 외람스럽다”면서 처벌을 촉구했지만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조영석은 전문화가들의 초상화를 감수하는 역에 그쳤다.  

1744년 영조의 51살 때 그린 초상화. 21살 때 모습과 얼굴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다만 장년의 영조 모습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지겹도록 그린 태조 이성계 어진
조선시대 땐 엄청난 숫자의 어진이 제작됐다.
국초부터 서울의 문소전, 영흥의 준원전,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 전주의 경기전 등 지방 5곳에 개국 시조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5곳 모두 존재의 이유가 있었다.

평양(고구려) 경주(신라) 개성(고려)은 옛 도읍이었고 개성의 목청전 터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이었다. 전주는 태조의 본관이었고, 영흥은 태조가 태어난 곳이었다. 이와함께 경복궁 선원전에는 태조를 포함, 역대 임금들의 왕과 왕후 초상화를 받들었다.
물론 이런 봉안의 원칙은 늘 지켜지지는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정묘호란 등 병란 때문에 봉안처에 모셔둔 영정들이 없어지고 건물도 불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어진은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됐다. 특히 태조의 어진은 엄청났다. 전신상과 반신상, 승마상 등 다양한 형식의 영정이 있었다. 명종 때인 1548년(명종 3년)까지만 해도 경복궁 선원전에 태조 영정이 무려 26축에 달할 정도였다. 

지금 남아있는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의 노년 전신상이다. 이 어진도 생전에 화가가 용안을 직접 쳐다보며 그린 도사본이 아니라 1872년 모사된 이모본이다. 태조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풍채 좋고 무술이 뛰어났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는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고는 다음과 같은 찬문을 짓기도 했다.
“호걸스러운 풍채(風彩豪傑)와 봉우리 같은 콧날이여.(華峯之準) 지략은 깊고 커서(智略深雄) 제갈량 같은 용이네.(南陽之龍)”(<포은집> ‘잡저·송헌 이시중화상찬’)
현재 남아있는 태조의 어진을 보면 금방이라도 호령을 지를 것 같은 위풍당당한 군주의 모습이다.

 

■‘참 늙어셨습니다.’
영조는 어느 임금보다 어진 제작에 힘을 쏟았다. <승정원 일기> 등에 기록된 것 만해도 10점이 넘는다.
매 10년 주기로 다양한 복장의 어진을 제작했다. 그러나 지금 남은 것은 두 점 뿐이다. 왕세제로 책봉되기 전인 연잉군 시절(1714년) 부왕인 숙종이 하사한 것과, 임금으로서 조선을 한창 통치하던 51살 때의 것 등 2폭이 남아있다.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는 당시 8개월간 병석에 누워있던 숙종이 자신을 지극히 간호했던 연잉군을 위해 제작해서 하사한 작품이다. 초상화의 연잉군은 눈꼬리가 올라가고 갸름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모습이다. 21살의 패기는 보이지 않고 다소 나약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반면 수염이 희긋희끗한 51살의 영조 어진

1900년 영흥 준원전 봉안본을 모사하여 제작한 어진과 일제 강점기에 촬영한 준원전 유리원판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태조 이성계 어진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1744년)은 연잉군 시절의 용모가 그대로지만 자신만만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이다.
그런데 <승정원 일기>를 보면 영조의 이 초상화를 둘러싸고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즉 1744년(영조 20년) 영조는 “오랫동안 어진을 살펴보지 못했으니 무슨 흠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어진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이때 2점의 초상화를 가져왔다. 한 점은 1733년(영조 9년) 40살 때, 다른 한 점은 1744년 당시 그린 51살의 어진이었다. 이때 영조와 대신들간 나눈 품평회가 재미있다.    
“백낙천의 시에 ‘나이 많은 형이 어린 아우를 마주 대하듯 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이 맞습니다.”(조현명)
“그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구나. 그런데 지금 보니 이 때만 해도 젊었구나! 옆에서 보면 늙지 않은 것 같은데 정면에서 보니 늙긴 늙었구나. 경들도 다가와서 자세히 보라.”(영조)
영조는 특히 시력이 좋지않은 화가 장득만에게 “안경을 쓰고 보라”고 권한다. 아마도 ‘젊으셨다’느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느니 입바른 소리를 기대했을 터였다. 그런데 언필칭 지존을 모신다는 신하들이라는 사람들의 대답을 한번 보라. 먼저 임금의 배려로 안경까지 쓴 장득만이 ‘돌직구’를 던진다.
“지금의 용안이 옛날 모습과 다릅니다.”

 

■“저기도 흰 수염 있네 뭐.”
임금이 “진짜 그러하냐”고 되묻자 조현명이 ‘확인사살’까지 한다.
“크게 다릅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물론 성상의 안색도 옛날 어진의 모습과 다릅니다.”
임금이 웃으면서도 볼멘소리를 던진다.
“경들은 항상 날 두고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러나 ‘눈치없는’ 장득만이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뜬다.
“지금 임금의 용안은 수염이 세어 하얗게 변했고, 인색도 많이 좋지않습니다. 전에는 홍조를 띠고 윤기가 있었는데….”
그러자 영조 임금이 서운했는지 한마디 툭 던진다.
“저기도 흰수염이 있구먼. 뭘.(彼猶有鬚白處矣)”
웬만하면 “하나도 늙지 않으셨다”고 덕담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늙었다’는 말을 걔속 해댔으니 참….
하여간 사람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 앞에서는 도대체 거짓은 물론이고, 입발린 소리도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보다.   

철종 어진. 쌍거풀 진 눈이 특이하다. 조선 임금들의 어진 48점은 한국전쟁 때 부산 동광동 창고로 옮겨져 있다가 1954년 12월26일 발생한 화재 때문에 거의 대부분 소실됐다. 영조 어진과 철종 어진 등이 남아있다. 철종의 어진도 반 가량이 불에 탔다.

 

■판자촌으로 가득찬 부산
어쨌든 조선의 어진은 전란과 화재 때문에 수난을 당하고 만다.
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병자호란에 이어 1900년(고종 광무 4년) 경운궁 실화사건까지…. 그때마다 영정모사도감을 설치해서 모사본을 제작했다. 조선왕조의 어진들은 1908년 칙령에 의해 국유로 이속됐다. 일제강점기에도 신원전에 보관됐던 조선 임금의 어진은 총 48점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이 어진들을 피란수도인 부산에 옮겼다.
부산은 피란민들로 가득찼다. 엄청난 주택난에 사람들은 이른바 ‘빠락’(바락크, barrack), 즉 가건물을 다닥다닥 붙여놓고 생존해야 했다. 그러니 불에 취약했다.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30일에 두차례에 걸쳐 일어난 국제시장 화재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비극적인 화마의 습격이다. 이같은 크고 작은 화재가 이어지면서 부산은 ‘화마의 도시’라는 오명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지은 가건물을 허물고 번듯한 집을 지을 수도, 지을 능력도 안됐다. ‘빠락’이 붙어있는 한 화재의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12월 10일 새벽 3시57분, 부산 동광동의 고물상 윤모씨 집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원인은 구공탄 부주의였다고 한다. 불은 강풍 탓에 삽시간에 번져 용두동 비탈에 옹기종기 붙어있던 판자집 1000여 호와 동광 국민학교 가건물이 전소됐고, 해병대 사령부 가건물 6동이 소실됐다. 4명이 사망했고, 이재민은 6000명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높은 지대다보니 불을 끌 물이 나오지 않은 까닭에 소방작업을 펼칠 수 없어 불길이 번졌다. 한때 부산의 번화가인 광복동 근처까지 위협하여 미영사관과 한국은 부산지점 일대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경향신문> 1954년 12월 11일자)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6일 후인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20분쯤, 다시 동광동 용두산 일대에서 큰 불이 났다. 이른바 ‘2차 용두산 화재’였다. 화재는 용두산 남쪽 동광동에서 전기공사 청부업을 하고 있는 정모(33)씨의 식모 안모양(22)이 판자집 2층 마루바닥에 촛불을 켜놓고 잠자다가 옮겨붙는 바람에 삽시간에 번졌다. 당시 27일자 신문은 “이 불로 빠락(판자집) 290동이 불탔는데, 이 말썽많은 용두산 일대의 전 판자집이 다 잿더미로 변했으며, 이재민이 1300여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잿더미가 된 조선의 임금들
그런데 4일 후인 12월31일 경향신문을 보면 심상찮은 후속보도가 눈에 띈다.
“지난 26일 새벽에 발생한 부산 동광동 대화재 소식은 이미 전한바 있는데 그후 전하는 바에 따르면 6·25 당시 부산으로 소개(疏開)했던 구황실 어용(御用)의 국보적인 서적 기명 장식품 등이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편 국악원에서 귀중히 여기는 고전음악보와 악기 등도 다수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향신문 그러면서 “구황실 관계 책임자와 당국 측이 진상파악을 위해 급거 부산으로 내려갔다”고 덧붙였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새해를 맞이한 1955년 1월6일자 경향신문이 진상조사 결과를 자세히 전한다.
“조사결과 12대 임금의 초상화(어진영·御眞影)과 <궁중일기> 등 약 4000점 중 3500점이 화마로 잿더미화 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일대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신문은 그러면서 자세한 피해내역을 전한다. 즉 창덕궁 선원전에 비장돼있던 임금의 초상화(어진영)와 친필글씨(어친필·御親筆), 그리고 역대재상들을 그린 초상화와 궁중일기 등의 서적과 은제기(銀祭器) 등 4000여점이 동광동 부산 국악원 창고에 보관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26일의 ‘제2차 용두산 화재’ 때문에 손쓸 틈도 없이 불에 탔으며, 반만 탔거나 재활용할 수 있는 물품 546점만 겨우 구출되어 광복동에 있던 국립박물관 창고에 보관했다는 것이다.
“현재로 보면 영조대왕과 철종대왕의 어진을 비롯해 2점의 임금 초상화와 34점의 역대 재상 초상화, 그리고 어필과 제기 등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1955년1월6일자 경향신문. 54년 12월26일 화재 때 조선임금들의 어진 등 국보급 유물들이 소실됐음을 뒤늦게 알리고 있다.

 

■“얼굴이 붉어진다”
신문이 밝힌 화재의 상황은 참담했다. 창고에는 평소 경찰관들이 상시 배치돼 있었다. 화재 발생 20분만에 창고의 지붕에 불이 옮겨붙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경찰관들이 화재를 발견하고 창고에 이르렀지만 출문이 굳게 닫힌 붉은 벽돌의 창고는 주변의 판자집과 더불어 맹렬한 불길에 쌓여 있었다. 원래 창고의 국보들은 머지 않아 서울로 옮길 예정이었다. 창고의 열쇠는 문교부와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었다.”
신문은 “이같은 국보적 어용물품의 소실로 학계는 물론 일반 뜻있는 이들의 크나큰 상심거리가 됐다”고 전하면서 구황실 물품의 관리소홀을 개탄하고 있다. 당시 문교부는 “문교부가 구황실 물품창고 열쇠를 갖고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라고 부인하기도 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4일 후인 1월10일 경향신문은 당시 이관구의 ‘월요시평’을 통해 화재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면서 ‘문화재를 귀중하게 여길줄 몰라 생긴 참사’라고 한탄했다.
“부산은 피란중 수도였지만 우리가 경험한 대화재만 해도 국제시장 화재, 부산역전화재 등 이루 셀 수 없으며, 보존이 필요한 문화재를 둔 것이 어수선한 도심의 광복동과 동광동이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서늘해진다.…4000년 이상 쌓아온 선조의 문화의 탑이 이처럼 무관심, 소홀히 훼손하고 우리는 무슨 문화민족이라 할 것인가. 어떤 이방인이 ‘한국의 선조가 남긴 찬란한 문화유업을 어째서 그리 천대하느냐’고 매우 괴이한 표정으로 묻는데 얼굴이 붉어질 뿐이다.”
지금 남아있는 조선의 어진은 몇 점인가. 태조 어진 1점과 영조 어진(연잉군 시절 1점 포함) 2점, 철종 어진 1점, 익종(순조의 세자) 어진 1점, 그리고 초본 상태인 고종어진 몇 점과 순종 어진 2점만 남아있을 뿐이다. 남아있는 어진도 상당부분 불탔다. 경향신문의 표현대로 ‘얼굴이 붉어질 뿐’이다.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내년 2월14일까지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 순간 부끄러운 민낯의 역사를 ‘털 끝 하나(一毫), 터럭 하나(一髮)’ 놓치지 말고 되돌아본다. 가슴이 미어진다.(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조선미, <왕의 얼굴-한중일 군주의 초상을 말하다>, 사회평론, 2012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 돌베개, 2009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솔, 2003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도록>, 국립고궁박물관, 2015
박정혜·윤진영·황정연·강민기, <왕과 국가의 회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한국고전번역원, <후설>, 한국고전번역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