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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원숭이 똥구멍만도 못한 인간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원숭이는 흔히 잔나비라 했습니다. 원숭이띠보다는 잔나비띠라 하는데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왜 원숭이를 잔나비라 했을까요. 사실 잔나비가 더 먼저였답니다. 원숭이라는 한자어는 18세기부터나 등장한답니다. 그러나 ‘빠른(잰) 원숭이(납·申)’라는 뜻의 잔나비는 16세기 정철의 가사 ‘장진주사’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잔나비가 다소간 원숭이를 폄훼하는 말로 일컬어집니다. 사실 잔나비, 즉 원숭이라는 동물은 사람의 얼굴로 사람의 흉내를 낸다고 해서 ‘혐오·흉악’스러운 인물의 상징으로 꼽혔죠. 예컨대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태어난 해(1536년)와 태어난 월·일·시 모두가 병신(丙申)이어서 원숭이왕(猿王)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간신이거나 대역죄인에게는 죄다 ‘원숭이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하지만 원숭이에게 그러한 오명을 씌운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원숭이를 간사하거나 어리석은 동물로 폄훼한 가해자가 바로 사람이라는 겁니다. 단적인 예로 순진한 원숭이를 속여 ‘조삼모사(朝三暮四)’한 장본인이 누구였습니까. 송나라 사람인 저공(狙公)이었습니다. 굳이 원숭이의 새끼를 잡거나 죽여서 원숭이 어미의 애간장을 마디마디 끊어놓은 ‘단장(斷腸)’의 애끊는 고사를 만든 자가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이중환의 <택지리>를 보면 “300마리로 구성된 원숭이부대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쳐부수는 선봉대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말 승려 조의선은 ‘사람의 얼굴을 닮은 원숭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동물’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너(원숭이)처럼 속임수가 많은 놈이(怪汝偏多詐)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사기 당하곤 한다.(逢人却被欺)”고 동정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쏙 닮은 원숭이(잔나비)를 앞세움으로써 그 자신의 추악함을 가리려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4회 주제는 ‘원숭이 똥구멍보다 못한 인간들’입니다.

 

“조물주의 뜻이 워낙 기괴하니(造物足奇怪) 덧없는 인생 미래를 알 수 있나.(浮生無定期) 그 중에 가장 불쌍한 것은 인면의 짐승(最憐人面獸)….”
고려말 학자 이곡(1298~1351)의 <가정집>을 보면 ‘원숭이 시’가 실려있다. 충선왕의 처남이자 승려였던 조의선이 지은 시인데, ‘사람의 얼굴을 닮은 원숭이가 가장 불쌍한 동물’이라며 동정심을 나타냈다.
“~이 세상도 서로들 속고 속이는데 뭐(世俗自相欺) 숲 속으로 돌아갈 희망은 없어도(林棲無復望) 우리에 갇혀 살 줄은 생각도 못했으리.(檻束本非期)”
원숭이가 사람에게 속아 우리에 갇힌 신세로 사람 손바닥에서 재롱이나 부리는 신세임을 읊고 있는 것이다.

청자모자원형연적(국보270호). 원숭이가 자식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원숭이는 단장(斷腸)의 고사가 있을만큼 부모자식간 정이 도타운 것으로 유명하다.|간송미술관 소장

■잰납이-잔나비
원숭이는 사람과 닮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기피 혐오 동물’로 조롱 당했다. 하기야 유전학적으로도 사람과 원숭이는 98%나 같다니까….
사람도 아닌 것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간사스런 흉내를 낸다는 이유로 ‘재수없는 물건’으로 손가락질 당했다. 원숭이를 지금에 와서 굳이 ‘잔나비’라 일컫는 것도 다소간 폄훼의 뜻이 담겨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미 이런저런 글에서 ‘잔나비’라는 말의 어원을 공부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다시 살펴보자. 알다시피 원숭이를 지칭할 때의 申자는 ‘납 申’이다. 여기에 또 빠르다(재다, 잰 걸음)는 뜻의 형용사형인 ‘잰(잔)’이 붙어 ‘잰(잔)납이’가 됐고, 이것이 연음으로 ‘잔나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송강 정철(1536~1593)의 그 유명한 권주가인 <장진주사>에 바로 잔나비 노래가 나오니 ‘잔나비’의 역사는 깊은 것이다.
“한잔 먹새근여… 곳 것거 산노코…뉘 한잔 먹자 갖고 잰납이 파람 불제야…”
사실 정철이 ‘잰납이 운운’은 그 자신이 원숭이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원숭이의 울음소리는 슬픔을 상징할만큼 구슬프다”고 했다. 즉 두보의 칠언율시인 ‘등고(登高)’를 보면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불며 하늘은 높고 원숭이 울음소리는 처량하게 들린다’(風急天高猿嘯哀)는 구절이 있다. 원숭이 울음소리는 흡사 휘파람 부는 소리 같다고 해서 원소(猿嘯·원숭이 휘파람)이라고 한다. 정철이 ‘장진주사’에서 ‘잰납이 파람 불제야’라 한 이유이다. 
 
■원숭이왕 풍신수길은 병신년의 사나이
아무튼 원숭이, 혹은 잔나비는 못생겼거나 혐오스럽거나 혹은 간사하거나 심지어는 대역죄를 지은 사람을 지칭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선에서 풍신수길 혹은 평수길로 일컬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수괴 풍신수길은 병신년(1536년)에 태어났는데, 얼굴이 못생기고 키도 작으며, 형상은 원숭이와 같아서 원왕(猿王), 즉 원숭이왕이라 이름붙였다. 낳자마자 오른손이 6개였다.”(<간양록> <난중잡록> 등)
그런데 <동사록>을 보면 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있다. “풍신수길이 태어난 해는 물론 태어난 달, 태어난 날과 시가 모두 병신(丙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풍신수길은 원숭이의 정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얼굴은 물론 몸까지 흡사 원숭이 같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풍신수길의 외모를 원숭이와 쥐 같은 형상이라고 폄훼함으로써 나라와 백성을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이 반면교사의 교훈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1591년 3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을 보라.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방약무인했다.”
문제는 ‘풍신수길의 풍모가 어떠냐’고 묻는 선조의 질문에 정사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의 대답이 상반됐다는 것이다. 정사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다”고 했지만 김성일은 “쥐와 원숭이상이어서 두려워할 위인이 못된다”고 했다. 당시 정권은 김성일의 동인이 잡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 황윤길의 경고는 무시됐다. 이 과정을 둘러싸고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결국 터무니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아예 일본을 ‘간악한 원숭이’로 표현했다. 선생은 을사늑약 1년 전인 1904년 72살의 노구를 이끌고 대궐문 밖에서 엎드렸다. 당시 고종이 일본화폐를 차관하고자 하자 ‘아니되옵니다’를 외친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신(老臣)은 “폐하의 이웃나라(일본)는 여우처럼 아첨하는 모습으로 원숭이처럼 간사하여 동맹을 깨뜨리고 조약을 조버려 조선을 삼키려는 술책을 행사하고 있다”고 했다. <면암집>은 72살 노구가 오래도록 궐문 밖에서 엎드리자 고종이 민망하게 여겨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렸지만 면암은 ‘원숭이(일본)의 꾀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상소를 거듭했다.

영락없는 원숭이상으로 폄훼된 풍신수길. 생년월일이 모두 병신(丙申)에 해당된다고 해서 원숭이왕으로 일컬어졌다.  

■유자광, 이시애는 원숭이 같은 역적
역대로 간신이나 반역죄인에게 붙은 오명도 역시 잔나비였다.
예컨대 안평대군의 측근이었던 이현로에게 ‘잔나비’라는 딱지가 붙었다. 이현로는 안평대군(이용)의 편에서 수양대군(세조) 세력을 견제하다가 계유정난으로 참형을 당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단종실록> 기자는 ‘여우처럼 아첨하고, 원숭이처럼 사특한 음흉한 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세조 때 난을 일으킨 이시애에게도 ‘원숭이처럼 간교한 역적’이라는 혹독한 비판이 내려졌다.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자 영의정 심회는 “이시애가 벌과 개미처럼 무리를 모아 원숭이처럼 간교를 부리고, 호랑이가 씹듯 포악하여 맷돼지처럼 날뛰었다”고 온갓 흉악한 표현을 다 써가며 역적 이시애를 단죄했다.
이 이시애의 난을 고변하고, 진압에 큰 공훈을 세운 유자광 역시 ‘잔나비’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유자광이야말로 이시애 뿐 아니라 남이마저 모함해서 죽인 뒤(남이의 옥·1468년)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삼아 그 악명높은 무오사화(1498년)까지 일으킨 ‘희대의 간신’이다. 실록인 <연산군일기> 등은 유자광을 두고 ‘성질이 음흉하고 남을 잘 해쳤으며, 재능과 명예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반드시 모함했다’면서 유자광의 어릴적 비행을 낱낱이 고발했다.
“유자광은 날래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나무를 원숭이와 같이 잘 탔다. 큰 기둥나무를 잡고 오르기를 원숭이처럼 했다. 세조 임금이 ‘저 유자광처럼 나무를 잘타는 이가 있는가’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려서부터 무뢰한으로 장기와 바둑으로 재물을 다투었고, 새벽까지 떠돌아다니며 길가에서 여자를 만나면 마구 끌어다가 음간(淫姦)을 했다.”

작자미상의 ‘안하이갑도’(眼下二甲圖).원숭이가 나뭇가지를 도구 삼아 두 마리의 게를 잡는 장면을 그렸다. 민화에서 게는 갑(甲)을 뜻하며, 선비가 소과와 대과 등 두 가지 시험에 급제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려대박물관 소장

 

■가능스런 사람흉내
중국의 전설에는 나무와 돌의 정령을 기망량이라 했다. 여기서 기(夔)는 다리가 하나이고, 사람 얼굴에 원숭이 몸으로 말을 한다는 전설상의 동물이고, 망량(망량) 역시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전설상의 동물이다.(<국어> ‘노어 하’) 사람 닮은 동물의 가증스러운 사람흉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성성이는 말을 하지만 짐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猩猩能言 不離禽獸)”는 말이 <예기>에 등장한다. 성성이는 오랑우탄의 한자어이다. 이 성성이의 소리는 어린애 울음소리 같고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줄 알며 술도 마실줄 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그래봐야 성성이는 성성이일 뿐, 사람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불교경전인 <승기율>을 보면 달을 건지려는 원숭이가 나온다. 즉 500마리 원숭이들이 사는 나무 밑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우물 속에 달이 비쳤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나뭇가지를 잡고 손과 꼬리를 서로 연결해서 우물로 들어가 달을 잡으려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져 한꺼번에 몰살당했다는 내용이다. 무모한 탐욕을 일컫는 말이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리키는 불교용어로 ‘심원(心猿)’이 있다. 원숭이(猿)처럼 불안한 마음(心)을 뜻한다. <대일경> ‘주심품’과 <돈황변문집> ‘유마힐경강경문’ 등을 보면 “마음의 원숭이와 생각의 말이 미쳐 날뛰기를 그쳤다(心猿意馬罷顚狂)”는 대목과, ‘60가지의 심상 가운데 심란하고 불안한 상태인 원후심(猿후心)’의 대목이 있다. 
<장자> ‘천운’에는 “원숭이에게 주공의 옷을 입히면 원숭이는 반드시 물어뜯고 찢어서 깡그리 없애버린 뒤에야 만족한다(今取猿狙而衣以周公之服 彼必흘齧挽裂 盡去而後慊)”고 했다. 무슨 말이냐. 주공(周公)은 중국 주나라를 세운 뒤 문물제도를 정비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주공을 문명의 상징으로, 원숭이를 무질서한 야만의 상징으로 대비시킨 표현이다. 

■원숭이이 사람의 갓을 쓴 격
원숭이를 폄훼하는 표현으로 가장 즐겨 쓰는 것이 바로 목후이관(沐후而冠)이라는 사자성어이다. 목후이관의 주인공이 바로 난세의 영웅이던 항우다. 항우는 불같은 기세로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점령한 뒤 궁궐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초나라 출신이던 항우는 고향인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뿐이었다.
“천하를 제패한 뒤에 고향 땅(초나라)에 돌아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격이 아닌가.”
‘금의야행(錦衣夜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새로운 근거지로 천하를 도모해야 옳았다. 어떤 이가 “이곳 함양을 중심으로 터전을 잡아야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간언했지만 항우는 끝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항우에게 간언했던 사람은 혀를 끌끌 차며 비웃었다.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목후)가 갓을 쓴 격(沐후而冠)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이 말을 들은 항우는 이 유세가를 팽살(烹殺·삶아 죽이는 형벌)시켰다.(<사기> ‘항우본기’) 또하나 유명한 사자성어인 ‘목후이관’은 겉모습만 사람일뿐 꼭 원숭이처럼 자기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는 뜻이다.

신라 성덕왕릉에 조각된 원숭이상.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긴 칼을 잡고 왼손은 허리춤을 쥐고 있다.

■원숭이에게 나무 타는 법을 가르치다니
각종 문헌에 지긋지긋하게 등장하는 고사 중에 ‘원숭이에게 나무 오르는 것을 가르쳐주지 마라. 그것은 진흙 위에 진흙을 붙이는 격이다(毋敎노升木 如塗塗附)’라는 <시경> 구절이 있다. 소인들에게 자꾸 나쁜 짓을 더 하라고 부추긴다는 뜻이다. 즉 원숭이는 소인이며, 나쁜 짓은 원숭이가 나무 오르는 행동을 가리킨다. 소인들을 꼬드겨 자꾸 나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더러운 진흙 위에 더러운 진흙을 바르는 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1441년(세종 23년) 성균관 유생 유이 등이 맹렬한 기세로 상소문을 올린다. 세종이 불교사찰인 흥천사를 보수한 뒤 이를 경축하는 경찬회를 열고, 친형인 효령대군이 독실하게 믿고 있는 불교를 용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효령대군을 두고 생불(生佛)이니 뭐니 하고 숭상하니 남녀를 막론하고 너도나도 중이 되려고 합니다. 엄벌을 내려도 시원치 않은데 전하께서는 만백성의 대표로 불교를 숭상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원숭이에게 나무 오르기를 가르치고, 더러운 진흙 위에 더러운 진흙을 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1437년(세종 19년) 사헌부가 “요즘 과거시험의 추세를 보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대신 글재주(사장·詞章)만 숭상하는 풍조”라면서 예의 ‘원숭이 나무론’을 개진힌다.
 “진사시(과거)에 공자와 맹자가 아니라 이백과 두보를 스승으로 삼아 문장과 글귀를 도둑질하여 모방만 일삼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원숭이에게 나무에 오르기를 가르치고 진흙 위에 더러운 진흙을 칠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숭이는 쓸모없는 이물질
1477년(성종 8년) 유구국(류큐국·현 오키나와)에서 원숭이를 바치자 사복시(말 등 동물을 관리하던 관청)가 “원숭이에게 옷과 집을 마련해주자”고 임금에게 청했다. 그런데 좌부승지(대통령 비서관) 손비장이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원숭이는 상서롭지 못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상서롭지 못한 동물에게 사람의 옷을 입힐 수는 없사옵니다.”
손비장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조선 뿐 아니라 왕조시대에는 군주가 애완동물을 함부로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완동물에 정신을 팔려 자칫 백성을 소홀히 할까봐 무척 경계했다. 손비장 역시 “원숭이에게 입힐 옷 한벌이라면 백성 한 사람이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를 자극했다. 그러나 성종의 입장 또한 분명했다. 원숭이같은 짐승에게도 살 길은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과인이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외국(류큐국)이 바친 동물을 추위에 얼어죽게 해서 되겠는가. 사복시가 청한 것은 사람의 옷이 아니라 그저 원숭이용 옷으로 녹비(사슴가죽옷)을 청한 것이다. 이것은 경이 잘못 들은 것이다.”
애완동물과 백성을 연결하려는 신하들의 마음씨도 가상하지만 원숭이에게도 살 공간과 옷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임금의 마음씨도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여하간에 류큐국 등에서 보낸 원숭이 진상품은 역대로 조선의 조정을 고민에 빠뜨렸다. 성종은 “잘못인줄 알면서도 원숭이 선물을 받았다”고 반성하면서 “다시는 왜인이 보낸 원숭이 선물을 받지말라”고 명했다. 연산군 시대에도 원숭이 선물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1502년(연산군 8년) 왜국에서 암원숭이를 바치자 연산군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동물을 받을 수 있겠느냐”면서도 “말(馬)은 받되 원숭이는 받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원숭이는 나라에 소용이 없고 기이한 물건이니 결코 받을 수 없지만 말은 전에도 바치는 경우가 있었다. 저(왜인)들이 굳이 받으라고 청한다면 (말은) 일단 받아두라.”
1599년(선조 32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선조가 명나라가 예물로 전한 원숭이를 ‘쓸모없는 이물질(異物質)’이라 표현하면서 되돌려 주었다. 1801년(순조 1년) 제주도 대정현 해안을 지나던 이양선이 뜬금없이 5명의 선원을 내려놓고 떠난 일이 <순조실록>에 기록돼있는데, 이들을 꼭 ‘원숭이 형상’이라 표현했을까.
“다섯명의 얼굴과 몸이 모두 검어서 형상이 꼭 긴팔 원숭이 같았다. 왜가리가 시끄럽게 지절거리는 것 같았고, 글씨는 난잡하기가 엉클어진 실 모양 같았다. 글씨는 왼쪽에서부터 횡서로 썼는데 글자모양이 꼬부라져서 알 수가 없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꼭 원숭이 같은 외국인 5명을 중국으로 보낼 것을 결정하면서 “대체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원록도’. 원숭이 두 마리가 십장생인 사슴과 소나무, 바위와 함께 그려졌다. 원숭이는 천도복숭아를 먹거나 들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삼모사(朝三暮四)와 단장(斷腸)
원숭이를 사람의 얼굴을 내세운 간악한 동물로 표현하며 손가락질 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다름아닌 사람이다. 자신의 간악함과 어리석음을 자신과 닮은 원숭이에게 투영시킨 뒤 마음껏 손가락질하는 비겁한 동물이 바로 사람인 것이다.
예컨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사람인’ 저공(狙公)이다.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도토리를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내더니,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모두 기뻐하더라는 내용이 아닌가. 이것은 <장자> ‘제물론’에 나온다.
인간의 잔인함과 대조되는 원숭이의 ‘슬픈 반전의 매력’은 유명한 고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바로 단장(斷腸), 즉 단원장(斷猿腸)의 고사이다. 단장의 고사는 두가지 버전이 있다. 한가지 버전은 동진의 환온(312~373)이 346년 촉(蜀)을 정벌하려 양자강 중류 협곡(삼협·三峽)을 통과할 때 만들어졌다. 부하 한사람이 원숭이 새끼 한마리를 붙잡아 배에 실었다. 자기 새끼가 붙잡혀가는 꼴을 본 어미 원숭이가 강가에서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배가 출발하자 어미 원숭이는 병풍처럼 펼쳐진 벼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왔다. 배가 100여리가 간 뒤 이윽고 강기슭에 닿자 어미 원숭이가 필사적으로 배에 올랐다. 그러나 힘이 빠진 어미원숭이는 그냥 죽고 말았다.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斷腸) 있었다.(<세설신어> ‘출면·黜免’)
또 하나의 버전은 같은 동진 시대의 설화모음집인 <수신기>에 나와있다.    
“어떤 이가 산에서 원숭이 새끼를 잡아 집에 돌아왔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가 그 사람의 뒤를 따라왔다. 그 사람이 새끼 원숭이를 뜰 안의 나무에다 묶어놓자 어미 원숭이가 그 사람을 향해 자기 뺨을 치며 애걸했다. 그 애처로운 광경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사람이 새끼 원숭이를 놓아주지 않고 결국 때려죽이니, 어미 원숭이가 구슬피 울며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다. 어미 원숭이의 창자 꺼내 보니,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
이 두가지 버전의 ‘단원장(斷猿腸)’ 고사를 읽고 사람과 원숭이 중 누가 더 잔인한 동물인지 생각해보라.

 

■원숭이는 부처님의 전생
오죽했으면 원숭이가 부처님의 전생이었겠는가. <육도집경>을 보면 500마리 원숭이가 굶주림 때문에 고통받자 원숭이 왕은 임금의 궁전에 들어가 “과일을 먹으라”는 명을 내린다. 임금이 노발대발하자 원숭이왕은 “저 원숭이들을 용서하고 내가 임금의 반찬이 되겠다”고 간청한다. 임금은 원숭이왕의 보시 정신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 원숭이 왕이 부처님이고, 500마리 원숭이는 부처님 제자인 500비구라고 한다. <대당서역기>를 보면 “부처가 인도 대린정사에 갔을 때 원숭이가 발우를 빼앗아 나무 위로 올라간 뒤 꿀을 담아 공양했고, 원숭이들이 합심해서 부처를 위해 못을 파주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도 있다. 원숭이왕이 구덩이에 빠진 사냥꾼을 천신만고 끝에 구해낸다. 하지만 며칠째 굶고있던 사냥꾼은 원숭이의 뒤통수를 쳐서 죽인 뒤 주린 배를 채웠다. 극강의 배은망덕이다. 그러나 죽은 원숭이왕은 이 사냥꾼을 불쌍히 여긴다. “이 세상에서 제도할 수 없는 사람을 내가 미래세에서 부처가 되어서라도 반드시 제도하리라”고 기원했다. 제도(濟度)는 고해의 바다에 빠진 중생을 건져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것을 일컫는다.
원숭이의 뒤통수를 친 것은 사람이지만 원숭이는 그런 사람을 감싸안은 것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원숭이가 의리의 표상이거나 부처님의 전생으로 여겨진 것이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를 도와 불교경전을 손에 넣도록 도와준 이가 누구인가. 바로 손오공이 아닌가. 그러나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수호했을 뿐이다.

장승업의 ‘송하고승도(松下高僧圖)’. 소나무에 앉아 있는 노승에게 원숭이가 불경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바치는 장면이다.

■조선을 구한 원숭이
원숭이는 나라를 구한 수호신이기도 했다. 이중환의 <택지리> ‘팔도총론·충청도편’을 보면 원숭이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아놓았다.
바로 명나라 지원군이 대첩을 거뒀다고 자부한 직산전투였다. 때는 바야흐로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9월7일이었다. 다시 조선을 침공한 왜적이 파죽지세로 남원-전주-공주를 거쳐 북상하고 있었다. 명나라 장수 양호가 10만대군을 이끌고 평양에 당도했을 때 급보를 들었다. 명나라군은 서둘러 경기 평택까지 달려왔다. 소사교 아래에서 매복한 명나라군은 충청도 직산(천안)으로부터 수풀처럼 빼곡히 북상하는 왜적을 바라보며 신묘한 계책을 냈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이 100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300마리로 구성된 원숭이(弄猿) 부대를 풀어넣은 것이다.
“원숭이들이 말에 올라 채찍질을 가하여 적진에 돌진했다. 왜적들은 사람같지만 사람이 아닌 원숭이를 보고는 어리둥절하여 진군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원숭이들은 즉시 말에서 내려 진중으로 돌입했다. 왜적들이 원숭이들을 잡아 죽이려 했지만 몸을 요리조리 잘 피했다.”
이들 원숭이 부대가 전진을 헤집어놓은 덕분에 왜적의 전력이 흩으러졌다. 이 틈을 이용해 명나라 철기병대가 적진을 짓밟았다. 왜적들은 조총과 화살을 제대로 쏘아보지도 못하고 크게 붕괴되어 후퇴했다. 왜적의 시체가 직산의 들판을 뒤덮었다. 택리지는 이 직산전투를 두고 “그 재빠른 지모와 절제의 공로는 이여송의 평양성 전투를 능가했다”고 평했다. 직산대첩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원숭이 부대였던 것이다.    
1796년(정조 20년)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원숭이 부대를 전투에 투입한 명나라 장수 양호를 위한 제문을 지으면서 바로 이 원숭이 부대의 전공을 언급한다.
“조선을 살린 건(再造我東) 창서 양호공일네.(蒼嶼楊公)…소사에서 적 맞으니(迎敵素沙)…다리 밑서 철갑을 걸치고(浴甲橋下) 재빠른 원숭이 삼백기병(弄猿三百) 한꺼번에 말 채찍질(一時鞭馬)…말굽 아래 무찔렀으니(悉殲蹄間)….”(<연암집>)
물론 <실록>과 같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연려실기술>은 임진왜란 때 원숭이가 어느 정도 활약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를 기록해놓았다.
즉 명나라군은 원숭이는 물론 소와 양, 돼지 등 갖가지 동물들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특히 원숭이들에게는 활과 화살을 차고 말을 타고서 앞에서 군대를 인도하게 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은 “원숭이들은 적진에 들어가 말의 고삐를 풀어 적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사람만나 사기당한 것은 외려 원숭이
그러고보면 이 글의 첫번째에 언급한 조의선의 시 마지막 대목이 절묘하다.
“괴이하구나. 너처럼 속임수가 많은 놈이(怪汝偏多詐)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사기 당하곤 하니(逢人却被欺)….”
뛰는 놈(원숭이) 위에 나는 놈(사람)에게 사기를 당한다? 바로 이 조의선의 시 중에 마지막 대목이야말로 인간과 원숭이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혼란한 세상을 만나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신세를 두고 ‘원숭이 나무 잃고 벌벌 떤다(騰猿失木只掉慄)’는 고사가 있다.(<장자> ‘산목·山木)’
뛰어다니는 원숭이(騰猿)들이 큰 나무 위에서 걱정없이 지내다가 가시나무 사이로 떨어져 이제는 오직 눈치만 살피고 벌벌 떨면서(危行側視 振動悼慄)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보의 시(‘기두위·寄杜位’)에도 있다. “추운 날의 해는 처마를 지남이 짧고, 궁지에 몰린 원숭이는 나무를 잃고 슬퍼하네.(寒日經첨短 窮猿失木悲)”라 했다. 이것이 꼭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딱한 신세가 아닌가. 떨어진 원숭이의 신세 말이다. 도리어 인간이 원숭이의 신세가 된 꼴이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원숭이해인 병신년을 맞아 2월22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열린다. 원숭이를 둘러싼 갖가지 오해를 풀고 특별전을 감상하기 바란다. 참, 특별전 이름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 붙였는데 단언컨대 필자가 배울 때는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였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뭐 이렇게 된 가사였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