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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신라-당나라 국제회담장이 된 철옹성

<25>3국통일 주춧돌 쌓고, 나·당 국제회담이 열린 철옹성(보은 삼년산성)

한반도 중원의 요충지였던 보은 삼년산성

 해발 350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성. 하지만 10~20m의 성벽 위에 오르면 충북 보은 일대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다. 서문을 거쳐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처음 만나는 아리따운 이름, 즉 ‘아미지(蛾眉池)’라고 새겨진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신라의 서성(書聖)인 김생이 썼다지 아마….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 같은 매력적인 연못이었으리라. 혹여 김생이 반달처럼 생긴 연못을 아름다운 여인의 윙크로 착각하고 이 감상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조선말 학자인 박문호(1846~1918년)도 절로 시상을 떠올렸나 보다.
“삼년성에 달이 떠오를 때 고을 남쪽 다리에 머물며 바라보니, 산은 하늘을 따라 끝없이 색을 붉히고, 가을바람 소리는 산골짜기를 따라 아득히 들려오는구나(三年城上月 留我郡南橋 岳隨空盡 秋聲出峽).”


 

 ◇격변의 470년대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이 삼년산성을 쌓을 때의 상황을 짚어본다면 그렇게 낭만을 부릴 수만은 없을 터이다.
 470년(자비왕 13년), 신라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를 막으려 이 성을 쌓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이라는 건 역사(役事)가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3년 걸렸으므로 이름 붙인 것이다(三年者 自興役始終三年訖功 故名之)”라고 했을 만큼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신라는 그것도 모자라 486년 성을 다시 수축했다. 이 때는 삼국의 정치·국제상황이 마치 끓는 물처럼 요동치고 있던 격변의 시대였다. 원래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보·기병 5만명을 보내 신라를 범한 왜를 무찌를 정도로 양국간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450년(고구려 장수왕 38년·신라 눌지왕 34년) 양국의 밀월관계가 깨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 7월 ‘실직(悉直)들판(삼척 부근)’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장수를 하슬라(강릉) 성주인 삼직이 습격하여 죽인 것이다. 크게 노한 장수왕은 “대왕과 우호를 다진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는데 이 어찌 의리 있는 일인가”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했다. 이에 ‘눌지왕이 굽실거리며 사죄하자(王卑謝罪)’ 겨우 물러갔다.
 이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치자 신라 눌지왕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했다. 신라의 친고구려 정책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자,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막으려는 나제동맹의 서막이었다. 458년 왕위에 오른 신라 자비왕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남쪽·동남쪽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를 쳐부수고, 성을 쌓아 지키게 했으며 북쪽 동해안을 따라 침범하는 고구려 군을 강릉-삼척 부근에서 무찌른 뒤 이하(泥河·강릉북부)에 성을 쌓았다.
 그런 다음 470년 삼년산성을 쌓았고 잇달아 모로성(471년)과 일모성·사시성·광석성·답달성(이상 475년)을 수축했다.
 이 가운데 한성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7일7야’ 공격 끝에 전사했다(475년 9월). 백제 개로왕 아들 문주의 원병요청을 받은 신라는 1만 명의 군사를 내줬으나 구원병이 한성에 다다르기도 전에 개로왕은 전사한다. 그야말로 한반도는 격동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같은 격변기에 축조된 삼년산성은 신라가 국력을 기울여 쌓은 가장 중심 되는 성이었다. 자비왕의 아들인 신라 소지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고 486년 장군 실죽(實竹)을 시켜 굴산성(屈山城·옥천)을 수축한다. 그야말로 국경지대에 걸쳐 철옹성을 쌓은 것이다.  

신라 태종무열왕이 당나라 침략을 봉쇄하기 위한 국제회담 장소로 쓴 삼년산성

◇삼년산성 축성으로 3국 정립의 기틀을 마련한 신라

이 철옹성 덕분에 고구려-백제 양강(兩强) 체제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신라는 명실상부한 3강으로 발돋움했으며 훗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신라가 이 삼년산성을 얼마나 높이 취급했는지는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660년 7월18일 당과 손잡고 백제를 멸한 태종무열왕은 9월 백제 도성인 부여의 사비성에서 삼년산성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나라 고종은 백제를 다스리기 위해 웅진도독부를 두고 도독에 당나라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인 왕문도(王文度)를 임명했다. 그리곤 태종무열왕에게 전달할 황제의 조서를 내린다.
 9월28일 삼년산성에서 신라·당나라 간 국제회의가 열린다. 당 고종의 조서와 선물을 가져온 왕문도와 무열왕의 회담 장소였던 것이다.
 왕문도가 동쪽을 향해 서서 서쪽을 향해 선 태종무열왕에게 조서를 주고, 다시 선물을 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왕문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어 시중을 들던 사람이 전달식을 대신 한 것(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삼국사기)”이다.
 왕문도는 왜 죽었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험한 산성을 올라온 왕문도가 심장병과 같은 지병이 도져 급사한 것이 아닐까.
 또한 태종무열왕은 왜 삼년산성을 당나라 사신을 맞이한 장소로 택했을까. 신라와 손잡고 백제를 멸한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 야욕을 싹부터 자르기 위해 철옹성 같은 삼년산성을 택하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이 엄청난 규모의 성을 보여주어 “너희들은 감히 침략의 야욕을 품지마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삼년산성은 신라가 자신하며 쌓은 요새였던 것이다. 삼년산성은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도 일어났으며(822년), 후삼국 시대엔 고려 왕건 마저 쓰라린 패배를 맛본 뒤(928년) 퇴각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왕건이 928년(신라 경순왕 2년)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을 쳤지만 이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왕건을 패배시킨 이는 아마도 후백제 견훤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후삼국 시대를 마감하면서 삼년산성의 가치 또한 떨어졌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삼년산성을 오항산성(烏項山城)이라 했고 “성 안에는 사철 마르지 않은 샘이 6개 있으며 무기창고도 있다”고 기록했다.
 지금도 이 성은 둘레만 해도 2.5㎞에 이르고 폭은 10m 내외로 높이는 지형에 따라 최소 10~20m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1979~82년 사이에 성벽만 조금씩 복원이 진행되어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서쪽 벽의 웅장한 모습이 하늘에 닿아 있는 듯,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 같다.
그러나 이렇게 복원된 모습은 성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거부감을 일으켰다. 원래의 석축에 사용된 석재는 점판암 계통의 석재인데 복원과정에서 화강암 계통의 새로운 돌을 쓰다보니 신구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 명필 김생이 새긴 아미지 표지석

 ◇당나라에 경고메시지 보낸 태종무열왕의 수레바퀴가?

어쨌든 과거의 조사결과 이 성의 정문은 가장 낮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서문터로 추정된다. 전투와 보급 등 두 가지 기능을 담당했던 삼년산성의 정문은 물자가 드나들 수 있는 낮은 곳이었을 것이다.
서문의 문지방 돌에는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다. 양쪽바퀴 사이가 1m66㎝이나 되는 폭넓은 수레바퀴 흔적이다. 이 흔적이 혹 태종무열왕의 수레바퀴가 아닐까.
고구려 평양 장안성 터에서 발견된 성문에서도 수레바퀴의 홈인 궤도가 확인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수레바퀴 사이의 너비가 1.5m 였다.
신라의 수레가 고구려보다 더 넓었다는 얘기다. 고구려 무덤에는 당대의 왕들이 수레를 타고 무장한 군인들과 시종들의 호위를 받는 모습을 그린 벽화가 여럿 있다. 신라시대 유물 가운데서도 흙으로 구운 수레의 실물 미니어처도 보인다.
그렇다면 호화로운 태종무열왕의 수레, 그리고 보급물자를 실은 수레 등이 삼년산성 서문을 드나들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축조연대와 이름이 확인된 가장 오래된 석성인 이 삼년산성은 축조방법도 신비롭고 과학적이다. 차용걸(충북대 교수)은 “한 층을 가로로 쌓았다면 다음 층은 세로로 쌓는 등 마치 우물 井자 모양으로 돌과 돌을 엇갈리게 쌓는 방식 이었다”면서 “요즘의 석공들도 자칫 무너질까 두려워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정교한 축조방법이었다”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문의 초석과 문지방 돌의 구성을 보면 문짝이 밖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 성문이 밖으로 열리게 만든 예는 사실 찾아볼 수 없다. 왜일까. 성의 구조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바깥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연못이 나온다. 그 이름도 아름다운 아미지이다.
따라서 문이 안쪽으로 열리도록 설계되면 바깥으로 출동하는 군사들이 잠깐 뒤로 물러섰다가 전진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편하다.
또한 문이 바깥쪽으로 열리면 군사들이 빨리 출동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서문으로 접근한 적들을 기습하려면 이처럼 좋은 전술이 없을 것이다. 삼년산성의 치성(雉城)은 반원형으로 된 곡성인데 그 선의 형태가 아름답기 이를 때 없다.
 치성이란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적의 접근을 쉽게 관측하며, 전투 때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측면에서 격퇴시키도록 성의 일부를 돌출시키는 구조물이다. 대개는 네모꼴로 만드는데 삼년산성은 곡선미를 강조했다. 5세기 후반~10세기까지 한반도 주도권을 다투는 쟁탈의 요소였던 삼년산성을 볼수록 매력있는 요새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 능산리 절터에서는 신라유물이 단 한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가 불구대천의 사이가 된 사연은?
필자는 이 대목에서 덤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찬란한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부여 능산리 절터엔 신라유물이 단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다.
이 유적은 고구려는 물론 중국·서역의 문물이 엿보이는 국제문화교류의 창구였는데도 유독 인접국인 신라의 유물만 없는 것이다. 
왜일까. 알다시피 이 능산리 절터는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절. 역사적으로 백제와 신라는 총 66회(백제멸망 이후 부흥군과 싸운 8회의 전쟁 포함)를 싸우며 패권을 다퉜지만 밀월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익에 따라 협력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게 외교가 아닌가. 백제·신라는 고구려 남하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삼년산성을 쌓을 즈음, 동맹을 맺고 있었다.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은 나란히 손잡고 551년 고구려가 장악한 한강유역을 점령했다.
 이미 538년 쪼그라든 국세를 만회하기 위해 사비(부여)로 천도하며, 국호도 부여족의 후예임을 강조하는 ‘남부여’로 고쳐 재기의 칼을 갈던 성왕이었다. 그러나 성왕의 꿈은 어처구니없게 산산조각난다.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군이 차지한 한강유역 6개 군을 홀랑 빼앗아 버린 것이다. 백제 성왕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진흥왕의 ‘배신’.
 한성에서 개로왕을 잃고 가까스로 국가의 명맥을 이어가다 겨우 고토(한강유역)를 탈환, 힘을 되찾은 백제 성왕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554년 7월 백제는 대가야군과 합세, 삼년산성 인근인 관산성(옥천)을 친다. 선발대는 태자 여창(餘昌·훗날 위덕왕)이 맡아 관산성(옥천)에서 공세를 준비했고 성왕이 친히 원정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백제는 돌이킬 수 없는 참패를 당한다. 성왕은 보병 50명의 호위를 받고 야간 행군하던 도중에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을 만난다.
 “백제왕(성왕)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했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섰으나 전제가 불리했다. 이에 신주 군주인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교전함에 삼년산군인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좌평 4명과 군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삼국사기).
 성왕의 목이 잘리고 최고관등인 좌평과 3만 대군이 몰살하는 대참패.
 위의 삼국사기 기록 중 성왕을 죽였다는 삼년산군(三年山郡)인 고간 도도를 기억하자.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전투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표현된다.
 성왕의 목을 친 도도는 신라 사마노(飼馬奴·말을 기르는 사람)출신이었다. 물론 삼년산성을 쌓은 삼년산군 사람이었다.
 도도는 성왕을 사로잡아 “왕이시어 머리를 베도록 허락 하소서 하자 성왕은 ‘과인이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았지만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겠다’”하면서 목을 늘였다. 신라는 성왕의 목을 군신회의를 하던 관청인 도당(都堂)에 묻었다. 백제로서는 엄청난 모욕이었다.
 성왕의 아들인 창(昌)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 왕위에 올랐는데 그 분이 바로 위덕왕(재위 554~598년)이다.
 백제와 신라는 이때부터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후 백제는 무왕(재위 600~641년)과 의자왕(641~660년)대에 걸쳐 끈질기게 불구대천의 원수국 신라를 윽박질렀다. 의자왕 때인 642년엔 신라 40여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궤멸상태로 몰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는 이처럼 처절한 복수전을 펼치다 나·당 연합군에게 허망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같은 대공세를 견디다 못한 신라가 당나라에 접근, 동맹관계를 이뤄 백제를 멸망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단 한점의 신라유물도 없는 부여 능산리 절터와 지금도 갖은 풍상을 견디며 우뚝 서있는 삼년산성은 이처럼 1,600년 전 격동의 역사를 담고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