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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5분만 견뎠어도…자궁파열로 숨진 산모(하)

최근 대만에서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아주 다정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의 미라가 발견됐습니다. 뭐 형체는 비록 흉하지만 아이를 안고 있는 품새에서 따뜻한 모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미라 뿐 아니라 모두 48구의 유해가 확인됐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원전 2000년 쯤 발생한 강진 때 엄마가 아이를 보호하려 했던 모습이 아니냐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이집트처럼 일부러 시신을 미라로 만들지는 않지만 이따끔씩 생생한 미라가 발견되곤 합니다. 특히 회곽묘를 썼던 조선시대 무덤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묘곽과 관에 흠이 없도록 싸바르는 회 때문에 관 내부가 완정 밀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발견된 조선시대 미라 가운데는 아주 드라마틱한 미라가 있습니다.
2002년 경기 파주 파평윤씨 묘역에서 발견된 모자 미라입니다. 왜 이 미라를 두고 극적이냐고 할까요. 바로 어떤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죽은채 미라가 됐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막 출생하기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미라의 자궁 속에는 태아가 남아있습니다. 아! 조금만 버텼어도 태아는 나왔고, 산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너무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이번주 이기환의 팟캐스트 80회는 ‘출산 도중 사망한 산모…아! 5분만 참았어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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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산모가 죽은 것은 1566년 윤시월(양력 12월)이었다.
모자미라의 옷고름에서 ‘병인윤시월’ 문구를 근거로 사망연도와 달을 역산해서 얻은 결론이었다. 산모는 당대 세도가의 여인답게 영양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전신조직 및 장기에 많은 지방에 축적돼 있었다. 그렇다면 산모는 어떻게 죽은 지 444년이 지난 지금, 이토록 완벽한 미라의 형태로 남은 것일까.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사계절이 뚜렷한 데다 산성토양이 대부분이어서 미라로 남는 경우가 거의 없다. 게다가 조선시대 장례풍습에 따르면 양반가문 사람이 죽으면 사체는 두 달에서 석 달까지의 장례의식을 끝낸 뒤 회를 두른 묘지에 매장됐다.  

미라 주변에서 확인된 숙빈의 편지. 이 미라의 이름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숙빈은 윤원량(1595~1669)의 딸인 윤양제일 가능성이 높다. 미라는 윤원량의 외손녀로 추정된다. 

■미라가 온전한 이유

이와 관련해서 갖가지 과학적인 분석결과 김한겸 박사팀은 결론을 내렸다.
즉 이 산모는 미라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조건을 절묘하게 갖추었다는 것이다.
먼저 산모는 윤시월, 즉 양력 12월에 사망했다. 여름에는 덥고 습하기 때문에 건조되기 어렵지만, 춥고 건조한 겨울은 미라 생성의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만약 여름에 익사했다면 2~3시간 후 가스가 차올라 눈이 튀어 오르고, 부패가스 때문에 햄버거처럼 피부가 부풀어 오릅니다. 어떤 상황이냐 하면 가스가 찬 복부에 구멍을 뚫어 불을 피우면 불에 활활 탈 정도입니다.”(김한겸 교수) 
“그렇다면 죽은 동탁(董卓ㆍ?~192년)의 배꼽에 심지를 꽂았더니 며칠씩 불을 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겠군요.”
“워낙 탐욕스러웠던 동탁의 배 속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심지를 태웠다는 게 삼국지의 표현이지요. 어쨌거나 여름철에 죽은 시체에서는 부패가스가 나와 불에 탄다는 겁니다.” 
그런데 겨울에 장례를 치른 시신의 경우 기온이 5도 이하로 내려가면 부패가 거의 진행되지 않는다. 부패보다 건조화가 잘 일어나 미라로 변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게다가 이 시신을 묻을 때 매우 두꺼운 이중 목관을 사용했다. 또한 사망한 여인을 정결한 겉옷과 속옷, 그리고 홑이불 등으로 겹겹이 감싸고 꽁꽁 묶어 몸과 얼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포장했다. 이로써 시신의 입과 코로 세균이 드나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회곽묘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시신을 목관 바깥에 다시 나무로 곽을 만든 뒤 여기에 회를 두른 묘에 묻었는데요. 관 내부에 숯 성분의 재를 깔았고, 안팎으로 송진, 종이, 천 등으로 틈을 막았어요.”
이 덕분에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습한 환경으로 노출됐는데도 관 속은 밀폐상태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중 삼중으로 발라놓은 회는 미라형성의 일등공신이 된다.
물이 회곽으로 스며들어오면 회는 시멘트처럼 굳어져 버린다. 발굴단이 이렇게 굳어진 회를 벗기려고 포클레인의 브레이커로 깨야 했으니까.
김한겸 교수팀은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즉 겨울이 지나 봄이 돌아왔을 때 여인의 사체에서는 장내 세균이 번식하기 시작해서 초기 부패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 초기부패를 담당하는 것은 장내 박테리아, 즉 호산소성 박테리아다. 그런데 꽁꽁 밀폐된 공간에서 관내의 산소가 모두 소진되었을 것이고, 산소결핍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산소성 박테리아는 죽어버리고, 혐기성(嫌氣性) 박테리아, 즉 산소 없이 자라는 박테리아만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혐기성 박테리아는 그동안 이론에서나 존재했을 뿐 실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해부학 전공인 임창섭 교수가 바로 이 미라에서 혐기성 박테리아를 확인한 것이었다.  
“엄교수가 전자현미경으로 스포어(sporeㆍ홀씨) 형태의 혐기성 세균을 확인했습니다. 놀라운 발견이지요.”
그런데 이 혐기성 세균 역시 미라의 장내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시신의 단백질 및 의류의 단백질이 계속 분해되어 수많은 유기산을 생성하고. 그에 따라 관 내부의 환경을 산성으로 변화시켜 따라서 혐기성 세균 또한 억제됐다는 것이다.
결국 이 여인은 겨울철에 죽은 데다 두꺼운 수의와 두꺼운 관, 회곽분 등 여러 가지 외부요인이 겹쳐 관속과 외부세계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양질(?)의 미라’로 변해갔던 것이다.

 

미라의 위에서 발견된 꽃가루와 규조류

 

■여인은 윤원량의 외손녀
그렇다면 430여 년 전인 1566년 안타깝게 숨을 거둔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역사학자들과 국어학자들이 분석에 나었다.
연구자들은 일단 모자 미라에서 확인된 부장품들을 유심히 살폈다. 특히 주목된 것은 시신의 머리카락을 감싼 종이와 참빗 한 개였다. 그 밖에도 다른 부장품을 묶은 한지(韓紙)도 관심거리였다 .
“이 시대 시신을 입관할 때는 죽은 이가 평소 주고받던 서간문을 관 속에 넣었던 풍속이 있어요. 1989년 발굴된 대구 달성 도동리에서 확인된 하씨 부인 미라에서도, 1998년 4월 안동에서 확인된 이응태의 묘에서도 서간문이 보였으니까.”
파평 윤씨 미라 모에서 확인된 편지 및 문서는 모두 7쪽이었다. 그 가운데 머리카락을 싼 종이는 ‘숙빈(淑嬪)’의 한글편지였다.
정광 교수(국문학)의 해독결과 편지의 내용은 특별한 사연은 아니고, 먼저 받은 편지의 답장형식이었다. 아마도 친정의 부모로부터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편지는 아주 짧은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겸양법 선어말어미를 6차례나 썼다. 이는 편지가 궁중에서나 쓰는 예절을 두루 갖춘 편지어투이며, ‘숙빈’이 자신보다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 보낸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편지에 나오는 ‘숙빈’이었다. 숙빈은 이 비운의 미라가 누구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첫 번째 열쇠였다.
정호섭 고려대 박물관 학예사는 파평 윤씨 가문의 족보인 ‘을해보(乙亥譜ㆍ1585년)’와 ‘갑술보(甲戌譜ㆍ1634년)’를 주목했다.
“미라와 비슷한 연대의 족보들에서 인종의 후궁으로 기록된 ‘숙빈’의 존재가 보입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았지요.”
정호섭이 주목한 이는 바로 “명종실록” 명종 2년2월(1547년)에 나오는 ‘윤양제’라는 인물이었다. 즉 1543년, 동궁(東宮)에 불이 났을 때 동궁(인종)을 구한 바로 윤양제하는 여인….
실록에는 이 윤양제를 두고 윤원형의 형인 윤원량의 딸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했다.
족보에 기록된 인종의 후궁인 숙빈과 명종실록에 나온 윤양제는 동일인물이 아닐까.
정호섭은 바로 “동궁의 화재 때 동궁을 구한 윤양제가 훗날 숙빈에 봉해진 것”이라고 보았다. 미라의 머리카락을 감쌌던 숙빈의 편지와 관에서 표시된 ‘병인윤시월’은 바로 미라의 신분을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이다.

위에서 확인된 기생충류

■불쌍하게 죽은 손녀를 향한 할아버지의 마음씨   

그런데 명종실록에서는 윤양제라고만 기록했을 뿐 ‘숙빈 윤씨’니 하는 분명한 언급은 없다.
“아마도 인종이 즉위 한 지 단 8개월 만에 승하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저 추측일 뿐이다. 어떻든 명종실록과 족보에 언급된 윤양제는 문정왕후의 오빠이자 윤원형의 형인 윤원량(1595~1669년)의 딸이다.
따라서 미라에서 확인된 숙빈의 편지는 숙빈의 아버지인 윤원량 집안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호섭은 윤원량의 가계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미라의 주인공이 윤원량 집안의 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았으니까요.”
먼저 윤원량에게는 윤소, 윤찬, 그리고 숙빈 등 3명의 자식이 있었다. 장남인 윤소(1515~1544년)는 족보상 기록으로는 군수를 지냈으며 젊은 나이에 죽었다. 둘째인 윤찬도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다.
4명의 자식을 둔 윤소에게 시선이 새삼 꽂혔다.
“윤소에게는 4명의 자식이 있었어요. 정실부인에게서 윤희천을 낳고 첩실에게서 윤희연(1534~1546년)과 윤희성, 그리고 첩녀인 딸을 낳았어요. 바로 이 첩녀가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미라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큰 겁니다.”
그런데 윤소가 윤희현을 낳은 것이 1543년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윤소가 20살 무렵에 낳은 자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첩실에게서 난 윤희성과 미라의 주인공인 여성 역시 20살 초반, 즉 1535~1545년 사이에 낳았을 것이다. 미라의 나이가 22~32살 사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미라의 주인공인 여성이 죽은 연도는 1566년.
미라에 대한 의학적인 연령이 20대 초중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윤소가 첩실에게서 난 막내딸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미라와 함께 나온 숙빈의 편지는 극존칭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부모인 윤원량과 그 부인에게 보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윤원량과 미라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다.
여기서 조사단이 또 주목한 것은 미라가 착용하고 있던 단령(흉배)이었다.
“이 옷이 미라보다 훨씬 크다는 것에 착안했어요. 단령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얘기죠.”   특히 단령은 노사흉배, 즉 해오라기(백로)문양의 흉배였다. 조선에서 노사흉배는 4품 이상의 고관대작만이 쓸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남편의 것일 가능성이 우선 꼽히지만 족보상에는 남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만약 미라의 남편이 4품 이상의 관료였다면 족보에 등재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윤원량과 아버지 윤소의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윤원량의 흉배였다면 이런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즉 첩의 딸로 태어난 미라의 주인공은 아버지 윤소가 요절한 뒤(29살ㆍ1546년) 출가했다. 그러다 출산이 임박하자 어머니가 있는 친정에 가서 아이를 낳다가 자궁파열과 그만 태아와 함께 죽었다.

이를 가엾게 여긴 할아버지 윤원량은 아들(윤소) 첩의 소생인 죽은 손녀를 위해 자신의 단령을 내주며 장례를 후하게 치렀다.
물론 아버지 윤소의 단령일 수도 있다. 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던 관복을 꺼내 죽은 딸에게 입혔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집안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한번도 받지 못하고 자란 첩의 소생이 출산 중 사망하자 이를 불쌍하게 여겨 아버지의 유품을 입혔을 수도 있는 거지요.”

미라와 관련된 파평 윤씨의 가계도. 미라의 주인공은 윤원량의 아들(윤소)가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출산이 임박했던 딸이 친정에 와서 아이를 낳다가 그만 자궁파열로 숨을 거뒀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난정과 미라의 여인

2007년 파주 교하로 이사 간 필자는 가끔장명산을 찾는다. 해발이 102미터에 불과한 장명산은 마치 용(龍)의 모습으로 능선을 토해내 파주 교하 오도리와 다율리, 당하리로 뻗어간다. 답사를 겸하기도 하지만 빼어난 산책코스이기도 하다. 지금은 비록 이리저리 깎여나갔지만….이곳 장명산 일대엔 고인돌이 100기 이상 확인된 곳이다. 지금은 다율리와 당하리 등에 20여기만 남아있지만…. 예전 청동기 시대부터 이곳은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기에 적합한 땅이라는 얘기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때 지체 높은 분들의 무덤이 아닌가.

더욱이 유명한 풍수가 최창조 교수는 “교하의 주산인 장명산의 맥에 자리 잡은 옛 교하중학교 자리(지금은 다율 방과후학교)는 대통령 관저를 비롯해 주요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설 최적의 입지”라고 꼽기도 했다. 하기야 이 일대는 조선조 광해군을 비롯해 잇달아 제기된 천도설의 중심에 섰던 곳이다. 이런 길지에 자리 잡고 있으니 파평 윤씨 가문이 지금도 조상의 음덕을 받은 것일지 모른다.

 

윤원형의 애첩인 정난정의 무덤. 첩의 신분이었으므로 남편의 뒤에 묻혔다.

필자는 손에 잡힐 듯 쭉쭉 뻗은 신도시 아파트 촌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미라의 무덤에 섰다. 고관대작을 지낸 윤씨들의 으리으리한 무덤 한편에, 그것도 방향도 90도 틀어진 채, 봉분조차 사라졌고, 비석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초라한 무덤이다.
바로 그 무덤이 첩의 딸로 태어나 430년 전 산고를 견디지 못한 채 태아와 함께 그만 젊디젊은 삶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 묻혀있는 것이다.   
조금 더 길을 가다보면 흥미로운 무덤 2기가 보인다. 바로 조선 명종 때 조정을 쥐락펴락한 윤원형과 그의 첩인 정난정(鄭蘭貞ㆍ?~1565년)의 무덤이다. 
정난정의 아버지는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鄭允謙)이지만, 어머니가 관비(官婢) 출신이었다. 하지만 정난정은 타고난 운명을 거스른다. 스스로 기생이 되어 윤원형의 누나인 문정왕후에게 접근한다. 결국 윤원형의 첩이 되어 정경부인의 작호를 받는 등 한 때 조선을 주무르다가 훗날 탄핵을 받아 자결하고 만다. 바로 정난정이 지금 이 순간 남편인 윤원형의 곁에 묻혀있는 것이다.
물론 정난정이 윤원형 곁에 '나란히' 묻힌 것은 아니다. 첩일 뿐이라는 신분 때문이다. 과연 정난정은 남편의 오른쪽 뒤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래도 정난정은 남편의 '뒤'에라도 묻혔지만 우리의 주인공인 비운의 여인은 어떤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어두운 무덤 속에서 미라가 되었다. 당대에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간 정난정에 비하면 미라 주인공의 신세는 그저 처량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녀는 430년 만에 우리들 앞에 홀연히 현현했다. 그녀의 삶은 너무도 짧았지만, 그녀의 몸은 우리에게 ‘역사’를 안겨 주었다. 그녀의 삶이 가치 있는 이유다.(끝)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