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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조선판 사랑과 영혼, "여보 나도 데려가요"

<이 글은 2010년 나온 졸저 <한국사 기행>(조유전, 이기환 공저) 내용 가운데 '안동 원이엄마의 표지-세계를 눈물로 적신 사랑이야기'입니다.>

 

볕이 따뜻했던 1998년 4월 초.
경북 안동 정상동 야산은 부산했다. 1996년부터 안동시가 추진했던 택지개발공사 예정지였기에 분묘이장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는 일부 안동 권씨 선산이 있었으나 고성 이씨 귀래정파(歸來亭派)의 선산이 대부분이었다.

고성 이씨 귀래정파의 입향조 이굉(1441~1516년) 이래 그 후손들이 정상동에 세거하고 있었다.

조선판 ‘사랑의 영혼’ 사연을 담은 원이엄마 편지|안동대박물관

 

■살아있는 묘제박물관 

따라서 이 선산에는 이굉의 묘에서부터 그 직계 종손과 후손들의 묘가 분포돼있었다.
안동대박물관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규모 택지개발에 앞서 문화재 조사가 필수적이었다. 

“귀래정파의 선산은 조선 중기~현재까지의 묘제연구에 있어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었어요.”(임세권 교수)      
발굴조사에 대한 욕심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박물관 측의 조사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연고 묘에 대해서는 조사를 할 수 있었으나 연고가 확실한 무덤에 대한 학술조사는 후손들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고성 이씨 문중도 당연히 연고묘들을 발굴없이 이장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조상의 묘를 발굴하는 것 자체가 불경죄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후손도 연고가 확실한 묘를 파헤친다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안동대박물관은 부산하게 이뤄지는 이장작업 현장을 체크하면서 무연고에 대한 조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문중의 이장작업은 4월5일 입향조인 이굉의 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부장품 뿐 아니라 지석도 발견되지 않았다.

 

■미라의 출현 

그런데 4월7일 오후. 한 통의 전화가 박물관에 걸려왔다.
“(고성 이씨 15세손이자 이굉의 손자인 이명정의) 무덤을 이장하려 하는데요. 회곽이 너무 단단합니다. 포클레인을 써도 도저히 깰 수 없어요.”
전화를 걸어온 이는 고성 이씨 귀래정파의 종손 이도형씨였다. 이씨는 “이렇게 단단한 회곽은 처음이니 박물관에서 좀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박물관으로서는 그야말로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죠.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그토록 단단한 회곽묘라면 그 안에 많은 복식자료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의류학과 이은주 교수를 급히 불러 함께 현장으로 갔어요.”
오후 3시30분, 현장에 도착해보았다. 이미 여러 상(床)의 회곽묘가 이장작업을 끝냈는데, 대부분 물이 스며들어 강도가 매우 약해져 있었다. 곡괭이로 쉽게 구멍이 뚫렸다. 포클레인으로 회곽 윗부분을 들어내자 인골만 남아있었다.
이미 이명정 부부의 합장묘도 파헤쳐진 상태였다. 그런데 남편의 회곽은 연질이고 그 속의 목관도 대부분 부식된 상태였다. 하지만 부인, 즉 일선 문씨의 회곽이 문제였다.

 

노출되는 이응태묘 관의 모습. 단단한 회곽교여서 여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단단한 회곽묘를 깨는 방법은 오로지 돌을 깨는 브레이커(Breaker)로 제거하는 것이었어요,”(임세권 교수)
그 결과 일선 문씨의 목관은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 노출됐다.
“일선 문씨가 먼저 죽고 이명정(1504~1565년)이 나중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일선 문씨의 관곽은 온전히 보존되고, 시신과 유물도 그대로 있었지만 이명정의 관곽은 모두 부식되고 인골도, 유물도 모두 부식되고 있었던 게지요.”
목관을 열자 시신을 감싼 이불과 관의 빈 곳을 채운 옷가지들, 그리고 시신에 입혀진 옷들을 부지런히 벗겨냈다.
급기야 시신의 얼굴을 가린 명목(소렴 때 시신의 얼굴을 감싼 헝겊)을 벗겨내자 일선 문씨의 전혀 부패되지 않은 얼굴이 노출됐다.
“시신은 피부만 역간 건조되어 검게 변색되었을 뿐 전혀 손상되지 않았어요. 몸의 장기는 부패되지 않은 듯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어요.”
뿐만 아니라 시신도 전혀 굳지 않았다. 팔다리와 몸이 움직였다.          
“곱고 단아한 일선 문씨의 얼굴이 40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거지요. 마치 잠에 든 듯한…. 머리카락 일부가 약간 희게 세었고, 주름도 없었어요. 기껏해야 쉰 살 전후 됐을까.”
이 무덤에서 확인된 유물은 모두 61점이었다. 견직물ㆍ마직물ㆍ마직물 등이 55점과 한지 2점, 초 1점, 호리병박 2점, 유리 1점이었다.
일선 문씨의 미라는 문중회의의 승인을 얻어 그날 밤 TV로 공개됐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족보에 있는 조상(미라)에 대한 더 이상의 연구는 그때만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후손들은 일선 문씨의 시신을 새 수의로 염을 한 뒤 새로운 관에 모시고 종손 집으로 운반했다. 시신은 다음 날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로 이장됐다. 

귀주머니에서 출토된 한글편지들.


■180㎝ 헌헌장부의 품에서 노출되는 한글편지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틱한 발굴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일선 문씨 묘에 대한 조사를 끝내고 유물정리가 한창이던 4월25일이었다.
일선 문씨 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덤이 발굴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무덤은 한번 파헤쳐진 아픔을 지낸 묘였다.
원래 택지개발 예정지구 내에 있던 이 무덤은 1995년 12월 지표조사 결과 무연고 묘로 분류되었다. 무덤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무성했다. 안동대 박물관 측은 이 무덤을 발굴대상으로 삼고 출입금지를 위한 경계선을 치고 안내판을 설치해놓았다. 
하지만 사고가 터졌다. 발굴을 위한 행정절차가 진행되던 1997년 11월 중순, 안동 지역의 어느 문중이 자신들의 ‘입향조’를 찾겠다면서 무덤을 몰래 파헤친 것이다. 그러나 실수였다.

“막상 무덤을 파자 목관 위에서 ‘철성(鐵城) 이(李)---구(柩)’라고 쓴 명정(銘旌)이 노출된 것이죠.”(임세권 교수)
‘철성’은 ‘고성(固城)’의 옛 지명이므로 무덤의 주인공은 고성 이씨임이 분명했다. 자신들의 입향조 무덤임을 확신하고 불법을 감수하면서 파헤친 문중이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래도 이 문중은 이 같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고성 이씨 문중을 찾아가 이실직고했으니 말입니다.”

이 문중은 파묘 당시 외관과 내관 사이에서 머리카락으로 싼 종이 1편을 고성 이씨 문중에 전달했다. 한글로 쓴 종이였다.
고성 이씨 문중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회곽과 내관 뚜껑이 훼손된 상태에서 다시 임시봉분을 조성한 뒤 현장을 보존하였다. 4월25일, 이 무덤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파헤쳐진 무덤은 흉한 몰골이었다. 회곽은 상부가 깨져 봉분 아래쪽에 방치돼있었고, 벽석은 회곽 주위로 넓게 파괴돼 있었다. 외곽 뚜껑은 이미 훼손돼있어 쉽게 들렸다.
“하지만 검은 칠을 칠한 내관은 방금 짜 맞춘 것처럼 대패자국이 선명했습니다. 향긋한 송진 냄새가 그대로 풍겨 나왔고…. 관의 두께는 9㎝나 되었어요.”
관 뚜껑을 벗겼다. 그러자 시신을 감싼 이불과 빈 공간을 채워놓은 옷가지들이 꽉 차 있었다. 일단 포클레인으로 내관을 들어내 묘광 밖으로 옮겼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있었다.
조사단은 이 내관을 정상동 종손 집 옆에 있는 정자, 즉 귀래정으로 옮겼다.
“시간이 지체되면서 이장 작업은 내일(26일)로 미뤘어요. 일단 관 내부에 있는 유물과 시신을 그날 밤까지 수습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날이 어두워졌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릴 태세였다.

머리카락을 싼 편지

 

“관을 정자 안으로 옮겨야 했지만 중장비가 정자 앞마당까지 들어올 수 없었어요. 전기선을 끌어왔으나 현장을 비추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하는 수 없이 자동차 전조등까지 켜고 작업을 시작했어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대렴과 소렴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유물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의복과 장신구들은 검은 점이 생겼지만 거의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목관 내부에서 대렴용 이불을 풀자 이불 안의 가슴 부위에서 한시로 쓴 만시(輓詩ㆍ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시)가 노출됐다.
“그리고 그 종이에 붙은 작은 종이가 또 확인됐는데요. 그 종이에는 작은 글씨가 가득 쓰여 있었어요. 그것은 놀랍게도 모두 한글이었습니다.”
수습된 유물 가운데는 부채도 있었는데, 그 속에서도 만시가 쓰여 있었다. 또 하나 작은 주머니, 즉 염낭이 확인됐다. 발굴 당시에는 그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날 약식발굴을 통해 출토된 유물은 총 72점이었다. 대렴구 28점, 소렴구 22점, 습구 22점이었다.

■세계적인 발굴이 된 편지

옷가지 등을 다 벗겨내자 시신이 노출됐다. 하지만 물이 스며들었던 탓에 그 형태만 있을 뿐이었다. 시신을 수습하려 하자 가루가 되어 으스러졌다. 그러나 인골의 길이는 180㎝였다. 주인공은 기골이 장대한 체격을 자랑한 사나이였던 것이다. 유물수습을 끝내자 시간은 새벽 1시를 넘기고 있었다. 잔뜩 찌푸렸던 날씨는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듯 굵은 빗방울로 변했다.
그렇다면 이 헌헌장부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모 문중의 파묘 때 나온 명정으로 ‘고성 이씨’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름은 읽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인지는 유물 출토 후에도 몰랐다. 

 

부채와 미투리를 싼 편지의 출토모습

하지만 유물수습과 정리 과정에서 쏟아진 편지류는 이 조사를 일약 ‘세계적인 발굴’의 반열 위에 올려놓았다.
“발굴과정에서는 한글편지가 나왔어도 워낙 고어(古語)였기 때문에 쉽게 해독하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유물정리 및 복원과정에서 연구자들은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지요.”

저명한 한문학자인 고 임창순 선생(당시 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장)을 비롯해  임노직 당시 국학진흥원 학예연구사. 안귀남 안동대 강사(국문학), 정교철 안동대 교수(지구환경학), 정규영 안동대 교수(생명과학부) 등이 연구에 매달렸다.
우선 앞서 밝혔듯 1997년 11월 모 문중의 파묘 때 한글로 쓴 종이 한 편을 발견한 바 있었다. 머리카락에 싼 이 종이조각을 판독한 결과 “싼겨틔 녀허 묻게 하소서~~. 바리디마라시고~~켜틔 녀하교셔.”라는 글자였다. 몇 글자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 즉 염낭 속에서도 편지 뭉치가 확인됐다.

“나중에 보존처리과정에서 편지뭉치가 발견됐는데요. 염낭은 지방질이 흡수되어 겉모습이 희고 매끄러웠는데요. 그 안에 여러 겹 접힌 직사각형의 편지가 11통이나 출토됐어요.”
그런데 이 주머니에서 나온 한자로 된 편지는 주인공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알려주었다. 11장 가운데 9장이 아버지(李堯臣ㆍ이요신)가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응태(應台)에게 보낸 편지였다. 초서로 쓴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아들 이응태는 처가에 주로 살고 있었다.
당시 전염병이 돌아 이를 조심하라는 것과, 달아난 노예가 많다는 것, 매 사냥과 관계된 내용 등이 주류를 이룬다.
“타작이 끝났더라도 무리하게 오지는 마라. 이쪽 유행병이 깨끗해질 때까지 기다려라.(且려(疫)疾 時未永絶麥打己盡 ○須强來)”
“노예들이 달아난 사람들이 많아 걱정이다.(○○○婢等如是途散, 何以○○, 深慮深慮)

연구자들은 고성 이씨 족보를 들쳐보았다. ‘이응태’는 바로 앞서 발굴한 이명정과 일선 문씨의 친손자였다. 할아버지인 이명정(1504~1565년)은 봉사(奉事ㆍ종종8품 문관벼슬)를 지냈으며, 일선 문씨와의 사이에 1남인 이요신을 두었다. 이요신은 2남3녀를 두었는데, 무덤의 주인공인 응태는 그 중 둘째 아들이다.
연구자들이 마지막으로 주목한 것은 목관 내부에서 나온 편지들이었다.
대렴용 이불을 풀자 이불 안 가슴 부위에서 확인된 만시를 쓴 큰 종이와 그 종이에 붙은 작은 종이에 적힌 한글편지, 그리고 부채에 쓴 만시였다. 가슴 부위의 만시는 가로 57㎝, 세로 83㎝이고 한시(漢詩)로 돼있었다.  

편지가 든 염

“울며 아우를 떠나보내며(泣訣舍弟), 아우와 함께 부모님 모신지(共汝奉旨甘) 지금까지 31년이 지났는데(于今三十一)…. 자네가 남기고 간 어린 자식 내 있어 보살필 수 있구려.(汝留遺後兒 我在遺可護)”
만시는 곧 형인 몽태(夢台)가 쓴 것이었으며, 이응태는 31살의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아우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아우가 남긴 자식까지 보살피겠다는 뜨거운 형제애를 보여준 것이다. 부채에 쓴 만시도 역시 형이 아우에게 쓴 것이었다.
“아우님의 곧음은 대쪽 같았고, 아우님의 깨끗함은 백지 같았네.(汝直如竹 汝潔如紙)”
 
■세계를 울린 ‘조선판 사랑과 영혼’
그러나 이 정상동 이응태 묘 발굴의 ‘찬란한’ 가치는 바로 형의 만시에 붙어있는 작은 종이에 쓰여진 한글편지에 있었을 줄이야.
“유물정리 과정에서 우리는 이 편지의 내용을 검토했어요. 한글체이지만 워낙 고어체여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해독했는데…. 글자를 해독하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에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현대어로 번역한 편지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이 아버님께. 당신이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셨나요? 나와 자식은 누가 이끌어 주며, 어떻게 살라고 당신 먼저 가셨나요? 당신이 나에게 향한 마음은 어떻게 하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한데 누워서 나는 당신에게 늘 말하기를, ‘여보, 남도 우리같이 서로 가련하게 여겨 헤아릴까요(사랑할까요)? 남도 우리 같을까요?’ 하고 당신에게 말하였더니, 어찌 그런 일을 생각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래도 난 살 수 없어 빨리 당신에게 가고 자 하니 나를 데려 가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은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아무래도 서러운 뜻이 끝이 없으니 이내 마음 속은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조사단의 심금을 울리는 편지는 계속됐다.
“곧 편지를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 말씀해 주세요. 꿈 속에서 편지 보시고 한 말 자세히 듣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일러 주세요. 당신은 내가 밴 자식 나거든 보고 살 일을 말하고 그리 가셨으니 그 밴 자식이 태어나면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나요. 아무래도 내 마음 같을까요. 이런 천지가 온통 아득한 일(?)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요. 당신은 단지 그 곳에 있을 뿐이지만 아무래도 내 마음 같이 서러운가요. 안타깝고 끝이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를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서 보이고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나는 꿈에서 당신 볼 것을 믿고 있어요. 확실하게 와서 보여 주세요. 나는 꿈에서 당신이 볼 것을 믿고 있어요, 확실하게 와서 보여 주세요. 끝이 없어서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아내가) ”
받는 사람을 ‘원이 아버님’이라 한 것을 보아 이응태의 부인이 죽은 남편, 즉 이응태에게 보낸 편지임을 알 수 있다.
형 몽태의 만시에서 보이는 ‘서른 한 살에 죽었다.’는 내용과, 부인의 편지 말미 내용, 즉 ‘병술 유월 초하룻날’이라는 표현, 그리고 조선 후기에 간행된 고성 이씨의 족보에 나타난 고성 이씨의 17대손 이응태의 생몰시기(1556~1568년)를 연관시켜보면 ‘병술년’은 1586년으로 추정된다.

 머리카락과 삼으로 만든 미투리

따라서 이 편지는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1586년)을 애통하게 여긴 부인의 눈물겨운 추모편지임을 알 수 있다.
편지는 부부가 “생전에 죽을 때는 꼭 함께 죽자”고 맹세할 만큼 금슬이 좋았고, 아내가 “사랑했던 죽은 남편을 따라 가겠다”면서 “나를 데려가 달라”고 애원한다.
부인은 또 “(돌아가신) 당신은 내 마음처럼 서럽지는 않을 것”이라고 원망하면서 “꿈속에서라도 이 편지를 보고 반드시 나타나 줄 것”을 몇 번이나 기원한다.
“‘원이엄마의 애끓는 사랑편지’. 이것이야말로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 할 수 있네.”(조유전 선생)
또 하나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빠뜨린 것은 부인, 즉 원이 엄마가 남편을 위해 만든 미투리(삼이나 모시 등으로 삼은 신)였다. 미투리는 미라의 오른쪽 부분에서 발견됐다.
“기막힌 것은 원이 엄마가 이 미투리를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麻)을 섞어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 미투리(가로 27㎝×세로 26㎝)는 한지에 싸여 있었는데요.”
연구팀을 더 ‘짠’하게 만든 것은 띄엄띄엄 읽을 수 있는 편지내용이었다.

“워낙 훼손이 심해 몇 군데만 읽을 수 있었는데 내용은 ‘이 신 시너 못…’이라는 내용이었어요. 즉 ‘당신을 위해 내 머리카락으로 정성스레 삼은 신이었는데 이 신을 신지 못하게 됐다’는 소리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지….”
이 유적이 발굴된 것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던 때였다.
“모두가 희망을 잃고 황폐화한 상황에서 이 조선판 ‘사랑과 영혼’의 스토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적셨습니다. 먼저 간 동생의 자식들을 챙기는 형의 마음씀씀이까지….”
당시 ‘감동적인 이야기’에 목말라 있던 언론매체는 대대적으로 발굴소식을 전했다.
안동대박물관은 이곳에서 수습된 안동양반의 옷 120여벌과 원이 엄마의 한글편지, 그리고 형(몽태)이 쓴 만시 등을 모아 1998년 9월 ‘450년만의 외출’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원이엄마의 편지를 전한 고고학 잡지

 

■사랑은 동서고금을 관통한다  

사랑의 사연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것.
지난 2007년 2월,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세계미라학회가 열렸다. 이 유적을 발굴한 임세권 교수와 이은주 교수가 공동작성한 논문, 즉 ‘응태의 무덤: 한 조선의 인물과 그를 사랑한 사람들의 편지(Eung Tae‘s tomb: a Joseon ancestor and the letters of those that loved him)’를 발표하자 참석한 전세계 학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현지 신문은 이 ‘조선판 사랑과 영혼’ 기사를 다투어 실었다. 그 해 11월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잡지인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은 원이엄마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미투리(짚신)를 소개했다.
그러자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영국의 고고학잡지 ‘앤티퀴티(Antiquity)’. ‘앤티퀴티’ 2009년 3월호 표지는 ‘원이 엄마의 편지 사진’과 함께 ‘중세 한국의 무덤과 만시(A medieval Korean tomb and its poetry)’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우리나라에서 출토되는 미라의 생성과정과 당시의 묘제, 그리고 그 묘제가 만들어진 역사 문화적인 배경 등을 설명했다. 또 무덤의 주인공인 이응태와 부인 원이엄마, 그리고 가족관계가 보여주는 조선사회는 어땠는지를 다뤘다. 이와 함께 원이엄마의 편지와 이응태의 형, 몽태가 남긴 만시 등이 영역되었다. 2010년에는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 잡지 ‘아케올로지(Archaeology)’ 2010년 3ㆍ4월호에 실렸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것도 약식발굴에 의해 450년 만에 현현한 ‘원이 엄마’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지구촌을 적시는 애잔한 사랑 이야기로 떠오른 것이다.  

고고학자 조유선 선생은 훗날 이렇게 코멘트했다.
“세상에, 평생을 발굴로 잔뼈가 굵은 고고학자들도 이런 고갱이의 발굴을 경험하기 어려운데…. 정식발굴도 아니었는데…. 세계고고학계를 눈물로 적신 일생일대의 발굴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