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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백제의 미소’ 불상, 아름답지만…40억원↑ 가격은 ‘국제호갱’ 감이다

호암미술관이 6월16일까지 열고 있는 전시회가 있다. ‘진흙에 물들지 않은 연꽃처럼’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다.

한·중·일 3국의 불교미술에 담긴 여성들의 번뇌와 염원, 공헌 등을 세계 최초로 조망하는 전시회란다.

전시회에는 한국·미국·유럽·일본 등에 소장된 92건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30억원 이하의 가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2018년 존재가 드러난 백제 금동관음보살 입상(왼쪽). 문화재 당국(제시금액 42억원)이 소장자(150억원 호가)와 환수협상을 벌였지만 가격차가 너무 커서 결렬됐다. 그러나 이 보살상은 2022년 매물로 나와 32억원에서 유찰된 ‘계미명’ 금동삼존여래입상에 비해 가치가 낮다는 평가가 나왔다. 광배와 받침대가 사라진 백제 보살상이 ‘명문+광배+받침대’를 모두 갖춘 ‘계미명’ 불상의 가치를 결코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호암미술관 제공·간송미술관 소장

■홀연히 나타난 백제의 미소?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한 점 있다. 부여 규암리 출토 백제 금동관음보살 입상(이하 백제 보살상)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에 ‘백제 시대 걸작’으로 회자되다가 어느 순간 행방이 묘연해졌던 불상이었다.

그러던 2018년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의 개인소장가가 이 불상을 국내 귀환(판매)를 전제로 공개한 것이다. 이 보살상을 친견한 이들은 “장인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빼어난 얼굴과 몸매”이며 “백제 7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보살상”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이 보살상은 1907년 무렵 충남 부여 규암리에서 출토된다.

백제의 미소

일제강점기 이후 사라졌다가 일본에서 존재가 드러난 백제 보살상의 얼굴. 밝고 자애로운 웃음이 압권이어서 ‘백제의 미소’라는 별명을 얻었다.|호암미술관 제공

경성일보 1935년 8월22일가 대강의 이야기를 전한다.

“1907년 농부가 부여군 규암면의 산지에 매립되어 있던 불상을 발굴했지만 헌병대가 압수했다. 보관 기한(1년)이 지나자 불상을 경매에 붙였고, 헌병대원 야마자키 지로(山崎次郞)의 수중에 넘어갔다. 유물 사진을 본 이치다 지로(市田次郞·대구 거주 의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상당한 돈을 주고 구입해서 조선으로 가져왔다…”

일본 학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의 언급(<보운>·1933년 9월호)은 디테일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1907년 규암리에서 발견…뚜껑 있는 쇠 솥 안에…작은 불상과 함께 있었다. 헌병대가 유실물로 보관했다가 1년 후 경매에 부쳤고, 2개의 불상 모두 모씨에게 낙찰되었다가 1922년 이치다가 구입했다.”

또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1973)는 “규암면에서 출토된 불상 2점을…헌병인 혼다(本多)가 압수 소장했다가 직속 상관이던 헌병 대장의 요구로 인도했다”고 기록했다.

3단 꺾기의 신공

백제 보살상처럼 자애로운 미소 띤 얼굴에 이렇게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게 ‘3단 꺾기 신공’을 발휘한 불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호암미술관 제공

■솥 안서 발견된 명작 2점

세가지 자료에는 착안점이 몇가지 있다. 하나는 규암리에서 발견된 불상이 두 점이라는 것이다. 그 중 한 점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관음보살입상(이하 국보 보살상)이다. 이 불상의 이력은 1937·1939년 조선총독부의 관보와 보물지정 및 관리대장에 남아있다. ‘국보 보살상’의 소유자는 니와세(庭瀨) 가문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은 천만다행으로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 점(백제 보살상)은 일본 헌병의 손을 거쳐 이치다 지로(市田次郞·1892~?)라는 인물에게 넘어간다. 일본 시가현(滋賀縣) 출신 의사인 이치다가 대구에 병원(이치다 의원)을 차린 것은 1917년 8월 무렵이었다. <조선시보> 1917년 8월21~9월7일에는 이치다 병원의 개원을 알리는 광고기사가 잇따른다.

이치다는 백제 보살상 외에도 최소 1000점이 훨씬 넘는 한국 문화재를 수중에 넣게 된다.

솥 안이 든 금동불상 2점

1907년 충남 부여 규암리 산지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2점). 농부가 솥 안에 든 불상 2점을 발견했다. 이중 1점(왼쪽)은 훗날 국립부여박물관에 귀속되었다.|국립부여박물관·호암미술관 제공

1939년 이치다 집을 방문한 도자 전문가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1900~1975)의 회고담이 눈길을 끈다.

“금동 관음보살입상은 조선의 3불 가운데 하나이다. 조금 허리를 비틀고 서 있는 자태가 빼어나고 미소 지은 얼굴이 아름답다. 조선 불상에서 이 정도로 뛰어난 것은 본 적이 없다.”

이 백제 보살상은 1929년 9월15~11월3일 대구의 경북 상품진열소에서 열린 ‘신라예술품 전람회’에 이치다 수집품(138건 305점) 중 대표작으로 출품되었다. 전람회 도록에 실린 흑백사진 2장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리건판 사진으로 남아있다.

이후 이 보살상은 ‘찬탄의 대상’이었다. 1939년 6월 일본에서 간행된 <미술연구> ‘90호’는 “조선의 수많은 소형 도금 불상 중 가장 우수한 명작이라 할만 하다”고 평가했다. 미술사학자인 세키노는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조각 중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답다”(<보운> ‘조선삼국시대의 조각’·1933)고 극찬했다.

농부의 발견

백제 보살상의 발견 이력을 보도한 경성일보 1935년 8월22일자. 농부가 발견한 뒤 경매를 거쳐 헌병대원에게 넘어간 것을 대구 거주 의사 이치다 지로가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보물지정에서 빠진 이유

이 때문일까. 일제 강점기에 ‘이치다 소장 백제 보살상을 보물(일부 신문에 국보로 표현)로 지정할 계획’이라는 언론 보도가 이어진다. 예컨대 1933년 8월13일 조선신문은 ‘대구의 2개 보물, 이치다 지로의 관음입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다.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회는 그 첫번째 대상 유물로 의사 이치다 소장 백제 금동관음입상과….”

헌병대 압수 후 경매

일본 미술사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전한 발견 스토리. 솥 단지 안에 있었던 불상이 2점이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임영애 동국대 교수 제공

무슨 말인가. 일제는 1933년 8월11일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하는 법(‘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을 반포한다. 그런데 이틀 뒤인 13일 대구 지역의 ‘보물’ 후보로 ‘이치다 소장 불상’ 등이 첫손가락으로 꼽힌 것이다.

다시 2년 뒤인 1935년 8월22일 조선신문과 경성일보에 ‘이치다 소장 불상의 국보(보물) 지정’ 관련 기사가 나란히 실린다.

경성일보는 백제 보살상의 발견 내력을 설명하면서 “이 불상이 국보(보물)로 지정될 모양”이라고 보도했다.

또 조선신문은 “이 불상은 일본 제실박물관의 미소구치(溝口) 미술과장의 조사결과 ‘국보(보물)지정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면서 “이번에 총독부의 보물지정 목록에도 편입되어 지정을 종용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작 조선총독부의 보물로 공식 지정되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이치다 개인이 재산권 행사 차원에서 백제 보살상의 보물 지정을 꺼려했을 가능성이 짙다.

상관에게 상납?

1973년 출간된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는 “불상을 수중에 넣은 헌병대원은 혼다이고, 이것을 헌병대장에게 상납했다”는 소장자 이치다 지로의 말을 전했다.

■사기 당한 이치다

그렇다면 이치다 소장 ‘백제 보살상’은 언제 일본으로 반출되었을까. 사실 이치다의 수집 유물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 반출에 실패한다. 즉 해방 직후 귀국선을 탄 이치다가 부산의 박모라는 인물에게 비용까지 지불하고 소장 유물의 반출을 맡겼다.

그러나 돈까지 미리 받은 박모가 이치다 소장품을 국제시장으로 빼돌려 1점당 2000~3000원을 받고 팔아치운다. 그렇게 흩어진 이치다 소장품은 국내 박물관·미술관 등 4곳에 분산 보관되고 있다.

백제 보살상의 주인

솥 안의 보살상 두 점 중 한 점은 1917년 무렵 대구에서 개업한 내과의사 이치다 지로의 수중에 들어갔다. 1917년 8월21일부터 이치다가 개업한 병원 광고가 신문에 계속 실린다.

그중 경희대 중앙 박물관은 깨진 금동관 2점을 비롯한 금은동제 유물을,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세형동검 등을, 리움은 깨진 금동관과 ‘뚜껑이 있는 청동제 꼭지 그릇’ 등을 분산 소장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동제불입상 1점 등 이치다 소장품 중 가장 많은 179건 1056점을 보관 중이다. 이치다가 보기좋게 ‘부산판 봉이 김선달’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 어느 속 좋은 한국인이 식민지에서 온갖 호사를 누린 일본인의 짐보따리를 곱게 보내주었겠는가.

“가장 뛰어난 조선 불상”

1929년 대구 신라왕조 예술전에 출품된 당시의 백제 보살상 사진.(왼쪽) 1939년 이치다의 집을 방문해서 보살상을 친견한 고야마 후지오는 “조선 불상에서 이 정도로 뛰어난 것은 본 적이 없다”고 감탄했다.

■황급히 묻은 불상 두 점

하지만 국내에 남은 이치다 유물 중 백제 보살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치다가 언제 일본으로 반출했는지 알 수 없다.

이치다 본인이 품에 안고 현해탄을 건넜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보살상의 실물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다 2018년에서야 보살상의 행방이 알려진 것이다. ‘문제’의 보살상과 관련된 착안점은 크게 세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이 백제 보살상은 1907년 발견 당시 뚜껑을 갖춘 솥 안에 든 금동불상 두 점 가운데 한 점이었다.

‘보물 후보’

일제는 1933년 8월 한국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을 반포한다. 그런데 그 첫 번째 보물 대상 유물로 이치다 소장의 백제 보살상이 선정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얼마나 뜬금없는 유물 조합인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왜 불상 두 점을 솥에 넣고 뚜껑을 닫아 숨겨놓았다는 말인가.

먼 훗날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나무 물통 속에서 발굴된 백제 금동대향로의 예가 그것이다. 2003년 경남 창녕 말흘리 절터의 원형 구덩이 속 대형 솥에서 쏟아져 나온 9세기대 불교공예품 500여점은 또 어떤가.

관심의 초점

1935년 8월22일 조선신문과 경성일보에 ‘이치다 소장 불상의 국보(보물) 지정’ 관련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두 신문은 “이 불상이 국보(보물)로 지정될 가능성이 짙다”면서 “당국(총독부)이 금동불상의 보물 지정을 이치다에게 종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660년 백제 멸망기의 충남 부여와, 9세기대 후삼국 혼란기의 경남 창녕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물론 건물 조성 때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각종 물건을 묻어두는 일종의 진단구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볼 수도 있다. 사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불교용품을 나무물통이나 솥에 숨겨놓고 황급히 피란한 상황이 읽히지 않은가.

화급한 순간만 지나면 곧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통일신라는 끝내 멸망의 길을 걷도 말았다. 그렇게 묻힌 불상 등은 1000~130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었고….

봉이 김선달에 당했다

이치다 유물 중 상당수는 해방후 일본으로 반출되지 못한다. 해방 직후 귀국선을 탄 이치다가 부산의 박모라는 인물에게 비용까지 지불하고 소장유물의 반출을 의뢰했다. 그러나 박모가 이 유물들을 국제시장에서 1점당 2000~3000원을 받고 팔아치웠다.

■무늬 전돌 출토지 100m 전

또 1907년 무렵 농부가 솥 속의 금동불상 2점을 발견했다는 지점(규암리)은 과연 어디일까.

1937년 인근 규암면 외리에서 진행된 발굴이 눈길을 끈다. 당시 조선총독부 조사단은 외리에서 발견된 ‘무늬 전돌(보물)’ 42점(완형)과 관련된 보고서를 쓰면서 흥미로운 내용을 담았다.

“…이치다 지로의 소유가 된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출토된 곳은 외리 유적과 불과 약 100미터 떨어진 곳이다.”

이 보고서의 도면과 현재의 인공위성 사진을 겹쳐 확인해보면 얼추 금동불상의 출토지를 특정할 수 있다.

즉 부여 규암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도로를 건너 위치한 야트막한 구릉이 바로 외리 유적과 백제 보살상의 출토지가 포함된 능선에 해당한다. 주변에는 민가와 관공서가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언제든 훼손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학술조사가 시급한 곳이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국내의 이치다 유물

이차다 소장품 중 부산에서 국내로 유출된 유물이 경희대박물관과 숭실대박물관, 리움 미술관, 국립경주박물관 등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절묘한 ‘삼단 꺾기’ 기술

이 불상의 가치를 조목조목 따져보자. 높이가 26.7㎝에 이르는 이 불상은 살포시 인자한 웃는 표정이 일품이다.

그래서 ‘백제의 미소’(삼불 김원룡의 표현)이라 하는 것이다. 머리에 3면 보관을 쓰고 있다. 천의(보살이 입는 옷)는 배에 한 줄, 무릎에 한 줄 등 U자를 이루는 두 줄로 되어 있다. 또 이러한 2줄 U자형 천의 속에 걸친 승각기(내의)에는 어깨끈이 달려있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온 달개 장식은 별도로 제작해서 붙였다.(임영대 동국대 교수)

이 백제 보살상의 특별한 매력이 있다. ‘자애로운 미소를 띠면서 무릎에 힘을 빼고 목과 허리를 살짝 비튼 자세’이다.

출토지점 특정

1937년 백제 무늬전돌 42점(완형)이 출토된 부여 외리는 백제 금동불상 2점이 수습된 지점에서 불과 100미터 떨어진 곳이다.

목과 허리, 무릎 등을 3번 꺾는다 해서 3곡(혹은 3굴) 자세라 한다. 시쳇말로 ‘삼단 꺾기’ 신공이 발휘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삼단 꺾기’의 기원은 5~6세기 북인도를 통일·지배한 굽타 왕조(350~550년 무렵)까지 올라간다, 당시 쇠퇴하던 인도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불상에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역동성을 표현했다.

발굴조사 시급

외리 출토 무늬 전돌 보고서의 도면과 현재의 인공위성 사진을 겹쳐 확인해보면 얼추 금동불상의 출토지를 특정할 수 있다. 부여 규암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도로를 건너 자리잡고 있는 야트막한 구릉이 바로 외리 유적과 백제 보살상의 출토지가 포함된 능선에 해당한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이런 꺾기자세는 6세기 후반부터 보이기 시작해서 수나라를 거쳐 초당(당나라 초기) 보살상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삼단 꺾기’ 신공은 백제 보살상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와, 그 이후에 제작된 한반도 출토 여러 보살상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백제 보살상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띤 얼굴에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게 ‘3단 꺾기 신공’을 발휘한 불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백제 보살상의 승각기(내의)와 군(裙·치마)에 표현된 넝쿨무늬를 보라. 백제 금동대향로의 문양과도 매우 닮았다. 출토지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외리출토 무늬 전돌에서도 유사한 넝쿨무늬를 볼 수 있다. 금동대향로와 무늬전돌, 그리고 백제 보살상이 모두 같은 시기(7세기 중엽)에 제작된 양식이라는 의미이다.(임영애 교수)

3단 꺾기의 기원

이러한 3단 꺾기 자세는 6세기 후반부터 점차 보이기 시작해서 수나라를 거쳐 초당(당나라 초기)의 보살상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백제 보살상은 7세기 초~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강희정 서강대 교수 제공

■의자왕을 위한 변명

7세기 중엽이라면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641~660)의 치세다.

따지고 보면 서산 마애삼존불과 미륵사탑, 정림사탑 등 백제 예술의 정수라는 작품도 모두 멸망하기 직전에 만들어졌다.

이 대목에서 백제 창업주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8)이 하남위례성을 쌓으면서 남긴 금과옥조를 떠올린다.

“기원전 4년(온조왕 15)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궁실을 지었다.”(<삼국사기>)

그렇다면 의자왕은 창업주 온조왕의 유훈을 까맣게 잊은 것인가. 절정의 예술 뒷면에 멸망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사치향락에 젖어들었던 것일까. 달리 볼 수도 있다. 백제가 웅진 시대(475~538) 이후 끊임없이 중국 육조의 문물을 수혈하면서 나름대로 구축한 독자 문화의 역량이 막판에 한꺼번에 분출된 것일 수 있다.

다양한 ‘삼단꺾기’ 자세

‘삼단 꺾기’ 불상은 이 백제 보살상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대 한반도에서 출토된 여러 보살상에서도 나타난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제 보살상이 300억~500억원?

이쯤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백제 보살상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2018년 문화유산계는 뜨악한 분위기에 빠졌다. 이 불상의 가치가 금동 반가사유상과 백제 금동대향로의 전시 보험가액(300억~500억원대)과 필적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수백억원을 들여서라도 사오는 것이 좋다”는 의견까지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였던가. 소장자가 처음으로 판매 의사를 밝힌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야 할 사람이 가격을 300억원이니, 500억원이니 하는 가격을 먼저 거론할 수 있는가. 흥정의 기본도 모른다는 비판이 나올만 했다.

넝쿨무늬의 비밀

백제 보살상에 표현된 넝쿨무늬는 금동대향로의 문양과도 매우 닮았다. 출토지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외리출토 무늬 전돌에서도 유사한 넝쿨무늬를 볼 수 있다. 금동대향로와 무늬전돌, 그리고 규암리 보살상이 모두 비슷한 시기(7세기 중엽)에 제작된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문화 유산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려놓는 우를 범할 수 있었다. 이후 문화재 당국이 보살상 소장자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소장자의 희망가격(150억원)과 당국이 제시한 42억원 간 간극이 너무 커서 결렬되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소장자와 협상이 결렬된 이후 이 불상이 중국 상하이(上海) 박물관 전시에 출품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일각에서 난리가 났다. “중국측이 이 불상을 매입해버리면 어쩌냐”는 둥 “한국 미술의 대표작이 중국 미술의 일부로 격하될 수도 있다”는 둥의 호들갑이 이어졌다. 그런 우려대로 중국측이 불상을 구입했을까. 아니었다.

불상의 가치

고미술시장에서 가치있는 불상의 가격은 10억~15억원 선이다. 예컨대 2020년 간송미술관이 매물로 내놓은 보물 금동불상 2점은 2점 합해 30억원 이하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낙찰되었다.

■‘계미명’ 불상도 30억원에 못미치는데…

그렇다면 대체 어쩌라는 건가. 소장자가 제시한 150억원을 다 주고 구입하라는 이야기인가.

사실 6년 전 문화재 당국이 제시했던 42억원도 국외 소재 불상의 귀환을 바라는 여론까지 반영한 파격적인 액수였다.

작품가격만 따지면 그것도 터무니 없는 가격이었다. 왜냐. 고미술시장에서 가치있는 불상의 가격은 10억~15억원 선이다.

‘계미명’ 불상의 가치

2022년 시장에 나온 국보 ‘계미명금동삼존여래입상’은 명문(계미명)에, 광배, 받침대까지 갖춘 완벽한 삼존불상이다. 그러나 경매가 32억원에서 유찰됐다.|간송미술관 소장

예컨대 2020년 간송미술관이 매물로 내놓은 금동불상 2점(보물)은 30억원 이하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낙찰되었다. 1점 당 15억원이 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극히 희귀하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불상이라야 30억원선에 거래된다. 대표적인 예가 있다.

역시 간송미술관이 2022년 경매에 내놓은 ‘계미명 삼존여래입상’이다.

명문(계미명·563년)이 돋보이는데다가 삼존불에, 광배와 받침대까지 완벽하게 갖춘 국보 불상이다.

그런데 이 국보 불상은 주인을 찾지 못했다. 경매가 32억원을 불렀지만 응찰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불교 속 여성’ 특별전

6월16일까지 열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진흙에 물들지 않은 연꽃처럼’ 전시회. 한·중·일 3국의 불교미술에 담긴 여성들의 번뇌와 염원, 공헌 등을 세계 최초로 조망하는 전시회다. 전시회에는 한국·미국·유럽·일본 등에 소장된 92건의 작품이 출품되었다.|호암미술관 제공

■‘국제호갱’이 되지 않게

그럼 이 ‘계미명~’ 불상과 백제 보살상의 가치를 한번 비교해보면 어떨까.

불상 연구자들은 ‘계미명’ 불상의 손을 들어준다. 왜냐. 백제 보살상에는 결정적인 흠결이 있다. 광배와 받침대 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백제 보살상이 ‘명문+광배+받침대’를 모두 갖춘 ‘계미명~’ 불상의 가치를 결코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백제 보살상을 금동대향로 및 반가사유상 등과 같은 반열에 올려두기가 주저하는 연구자도 있다.

종합해보면 백제 보살상의 가치를 굳이 가격으로 친다면 ‘계미명~’ 불상의 30억원을 넘기 어렵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백제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보살상은 당연히 환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일본으로 반출되어 최소 80년 이상 행방이 묘연했던 불상이 아닌가. 그러나 절대 서두르면 안된다. 소장자와 합리적인 가격을 두고 차분하고 끈질긴 협상을 통해 환수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추진해서는 안될 일이다. 아무렴 ‘국제 호갱’이라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 (이 기사를 위해 임영애 동국대 교수, 강희정 서강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배기동·민병찬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이승혜 리움 미술관 큐레이터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임영애, ‘백제 규암리 금동관음보살 입상의 유전, 그리고 그 성격’, <미술사와 시각문화>26호, 사회평론, 2020

강희정, <관음과 미륵의 도상학>, 학연문화사, 2013

김원룡, ‘백제불교조각연구’, <대한민국 학술원 논문집(인문사회과학)> 31집, 대한민국 학술원, 1992

황수영 편,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한국미술사학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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