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뼈가 가루가 되도록 싸웠다’…사료 만으로 따져본 양규의 7전승 신화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양규)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새삼 부각되는 역사적인 인물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고려판 세종대왕’으로 통하는 고려 현종(992~1031, 재위 1009~1031)이죠.

1254년 몽골의 잇단 침략에 시달리던 고종(1231~1259)이 종묘에서 ‘국난 극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면서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하죠. “세종대왕(世宗大王·현종)께서 큰 난리를 평정하여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웠다”고 표현한 겁니다.

본래 ‘세종’이라는 묘호는 나라를 중흥시켰거나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군주에게 사후에 올리는 건데요. 현종은 비록 ‘세종’의 묘호를 받지는 않았어도 고려시대 내내 ‘위기에 빠진 나라의 기틀을 다잡은 세종대왕’으로 대접받았습니다.

 

■고려판 이순신

또 한 분은 2차 고려-거란 전쟁 승리의 주역인 양규(?~1011) 장군입니다.

돌이켜보면 3차례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낸 세 분이 있죠. ‘1차(993~994)=서희(942~998)’, ‘2차(1010~1011)=양규(?~1011)’, ‘3차(1018~1019)=강감찬(948~1031)’입니다.

그런데 서희와 강감찬 등에 비해 2차 전쟁의 주역인 양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습니다. <고려사>에 양규 장군의 행적은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한 1010년 11월16일부터, 장렬하게 전사한 1011년 1월28일까지 딱 2개월 10여일치만 남아있습니다.

현종은 전쟁 후 양규 장군에게 ‘공부상서’ 관직을 추증했고요. 부인에게는 ‘은률군군(殷栗郡君)’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면서 해마다 벼 100곡을 제공하고, 아들(양대춘)에게도 관직(교서랑)을 주었습니다.

 

현종은 그때 양규의 공을 거론합니다.(<고려사> ‘열전·양규’)

“그대의 남편이…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를 안정시켰다…이로써 고려의 강토가 보존될 수 있었다…”

양규는 1024년(현종15) ‘삼한후벽상공신’의 칭호까지 하사받았습니다.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은 ‘태조 왕건 때의 삼한공신 이후 공신각의 동·서벽에 초상이 봉안된 공신’을 뜻합니다. 또 1109년(예종 4)에는 양규의 증손자인 양제보에게 은합(은그릇)을 하사했습니다. 이런 분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홀대를 받았던 겁니다.

그러다가 이번 드라마 덕분에 ‘양규=고려판 이순신’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요. 고려땅을 넘본 거란군을 끝까지 섬멸하다가 전사한 양규가 이순신에 버금가는 활약을 거뒀다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도 퇴각하는 왜군과 최후 일전(노량해전)을 앞두고 “이 원수만 무찌르면 죽어도 한이 없다(此수若除 死則無憾)”고 외치며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통주성(북한 보존급 문화재 138호). 강조가 이끄는 3만 고려군이 인근 삼수채에서 전사했지만 중랑장(정5품) 최질(?~1015)·홍숙(미상) 등이 성문을 굳게 닫고 막아낸 통주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거란군은 곽주성으로 진격했다.(출처: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백과>, 2008)

 

■“강조의 죄를 묻는다”

이제 <고려사> <고려사절요> <요사> <송사>에 기록된 ‘2차 고려-거란전쟁(1010~1011)과 양규 장군 이야기를 해봅니다.

1009년 1월 고려에서 큰 정변이 일어나죠. 서북면순검사 강조(?~1010)가 목종(997~1009)을 폐하고 현종을 세운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자 거란의 성종(재위 982~1031)이 제2차 침입을 결정합니다.(1010년 5월)

“임금을 시해한 고려 강조의 대역죄를 묻기 위해 출정하겠다”(<고려사> ‘세가·현종’)고 선언한 겁니다.

좀 뜬금없죠. 이때 소적렬(생몰년 미상)이 “전쟁의 명분이 부족하다”면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요사> ‘성종’조)

“고려는 작은 나라지만 성과 보루가 튼튼합니다…사신을 보내 죄(강조의 임금 시해죄를 외교적으로)를 물으면 되는데….”

<요사>는 “거란인들은 ‘소적렬의 주장이 옳다’고 여겼지만 황제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황제가 직접 정벌군을 지휘하는 ‘친정’을 선포했습니다. 고려도 가만 있을 수 없었죠.

강조가 행영도통사를 맡아 30만 대군을 이끌고 통주에 진을 쳤습니다.(<고려사> ‘세가 현종’) 정변으로 권력을 움켜잡은 강조지만 자신을 겨냥한 전쟁의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려 했던 겁니다.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11월16일 보·기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거란 성종은 흥화진(평북 피현군 당후리)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짜잔~’하고 등장합니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거란 황제가 흥화진을 포위하자 양규는 도순검사(조정이 파견한 임시 군지휘관)가 되어 흥화진사 정성(생몰년 미상), 부사 이수화(?~1051), 판관 장호(미상) 등과 함께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흥화진성은 22일까지 7일 동안 펼쳐진 거란군의 거센 공세에도 끄덕없이 버텼습니다.

거란 성종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항복을 권유하는 칙서를 잇달아 보냅니다.

“역신 강조를 사로잡아 네 앞에 보내라. 그럼 철군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경으로 들어가 너희 처자를 죽일 것….”

그러나 양규를 비롯한 흥화진성은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양규 등은 흥화진 부사 이수화의 명의로 답장을 보내는데요.

“(황제께서는) 군사를 돌려 자중해야 용맹스런 고려 군대의 복종을 얻을 것입니다.”

 

거란 성종은 재차 비단옷·은그릇 등을 흥화진 장수들에게 선물하면서 어르고 달랩니다.

“올린 글을 보니 귀순하겠다는 뜻을 도무지 볼 수 없고, 내용도 불성실하며 문장도 겉으로만 공경을 보일 따름이구나.”

그러나 고려군은 “우리는…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고려의 종묘사직을 받들 것”이라면서 결사항전을 외쳤습니다.

“거란 성종은 ‘고려군이 결코 항복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읽고 흥화진성의 포위를 풀었다. 거란 임금은 20만 대군을 흥화진 인근인 인주(의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켰다. 나머지 20만 대군은 통주로 진출했다.”(<고려사> ‘열전·양규’)

이 흥화진의 항전은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거란군의 7일 공세에도 끄덕없이 성을 지켜냄으로써 거란의 40만 대군 중 절반인 20만명의 발목을 묶어둔 겁니다. 무엇보다 양규 장군은 이렇게 지켜낸 흥화진을 기반으로 거란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반격작전을 펼침으로써 치명타를 안겼습니다.

 

■그래도 강조의 충심만은…

어쩔 수 없이 흥화진을 건너뛴 거란군의 다음 목표는 강조가 지키고 있던 통주성이었습니다.

전투는 11월25일부터 12월초까지 벌어졌습니다. 강조는 성을 부하들에게 맡겨두고 본인은 통주성 남쪽(삼수채)까지 나와 거란군과 싸웠는데요. 처음엔 연전연승했대요.

“거란군의 공세를 일렬로 배치한 검차(劒車·칼날 꽂은 방패차)로 반격해서 모조리 승리했다.”

그러나 ‘경적필패’라는 말이 있죠. 거란군이 총공세를 펼쳐 고려 진영을 뚫었는데요.

몇차례 승리에 도취된 강조는 적군의 침입 사실을 보고 받고도 바둑을 두면서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게 들어오면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결국 물밀듯이 밀려온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답니다.

강조는 “내 신하가 되라”는 거란 성종의 권유에도 “고려 사람이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버텼구요. 칼로 살을 발라내며 물어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처형 당했죠. 임금(목종)을 죽인 죄가 있었지만 고려를 향한 충심은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고려군 3만명이 전사했는데요.

 

■“나는 왕명을 받고 왔을 뿐…”

그렇게 강조 군대를 깨뜨린 거란군은 통주성으로 달려가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성을 지키고 있던 중랑장(정5품) 최질(?~1015)·홍숙(미상) 등이 성문을 굳게 닫고 막아냈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통주성도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거란은 흥화진에 거짓으로 꾸민 강조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긴 겁니다.

거란군은 흥화진에 이어 통주성도 점령하지 못한채 곽주성 공략에 나섭니다.(12월6일)

곽주성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함락되었습니다. 거란군은 6000명을 성에 잔류시켰습니다.

그러다 10일 뒤인 12월6일이었습니다.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양규 장군이 필살의 반격작전에 나섭니다.

흥화진 군사 700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흩어진 군사 1000명을 수습했고요. 밤중에 거란군이 잔류한 곽주성을 공격한 겁니다. 불의의 기습작전에 거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요. 양규 장군은 성 안의 백성 7000여명을 구출해 통주성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흥화진과 통주성을 사수하고, 빼앗겼던 곽주성마저 탈환하자 거란군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군의 항전의지는 대단했다. 거란황제가 이끄는 40만대군이 흥화진을 포위했지만 양규 장군을 비롯한 흥화진의 고려진영은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거란 성종은 흥화진을 포기하고 남진했다.

 

■초조해진 거란황제

전쟁이 길어질수록 거란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원래 유목민인 거란이 전쟁을 벌일 때는 “출병은 9월을 넘기지 않고, 철군은 12월을 넘기지 않는다”(<요사> ‘병위지’)라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정주민(고려 등)의 경우 보통 9월이 되면 추수를 끝내고 곡식을 저장하잖아요. 그런데 거란군은 전쟁 수행기간 중 군량을 현지 조달했거든요.

그러나 전통적인 고려군의 ‘청야술’로 거란군은 고려 땅에서 조달할 식량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12월이 지나면 말들을 다시 초원에 방목해야 할 시기가 되죠.

그런데 전쟁이 질질 끌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무엇보다 출병의 명분으로 내세운 ‘강조의 죄’는 어찌 되었습니까. 일찌감치 강조를 죽임으로써 전쟁의 명분이 사실상 사라진겁니다. 거란군은 철군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황제가 친정한 전쟁이 아닙니까. 그런만큼 고려 현종의 무릎을 완전히 꿇려야 황제의 체면이 사는 건데요. 그러나 고려가 그렇게 녹록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죠.

통주성 앞 삼수채에서 강조를 붙잡아 죽인 거란군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에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서북면도순검사 양규 장군은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을 받고 온 것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고려의 거짓 입조 약속

사실 고려 현종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흥화진-통주를 지켰고, 곽주도 재탈환하기는 했죠.

하지만 거란군이 안북부와 숙주 등을 함락시겼고요. 서경이 풍전등화의 지경에 빠졌습니다. 이 무렵 고려 진영은 ‘현종이 거란 성종을 알현하는 조건’으로 한 강화를 제의하기는 했는데요.(<고려사절요>) 그러나 현종이 쉽게 거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죠. 강화 제의에도 불구하고 서경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16일간(12월11~26일) 벌어졌구요.

결국 거란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한채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돌진합니다. 급기야 12월28일 현종이 개경을 떠나기로 결정했는데요. 피란을 권한 이는 예부시랑(정4품) 강감찬이었습니다.

“(전쟁의 책임이 있는) 강조가 이미 죽은 만큼 우려할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의 형세가 워낙 강성하므로 일단 그 예봉을 피해야 합니다. 다음에 반격해야….”(<고려사절요> 12월28일)

이것이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보이는 유일한 ‘강감찬 관련’ 기사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강감찬이 동분서주하지만 역사서에서는 딱 한 장면에만 등장합니다. 현종은 전라도 나주를 최종 목적지로 몽진을 떠나게 되었구요.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강감찬 관련 기록은 딱 한번 보인다. <고려사절요>는 “거란군이 개경을 위협하자 예부시랑 강감찬 만이 홀로 ‘지금은 중과부적이니 일단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옳다’고 현종에게 고했다”고 했다. 강감찬의 역할은 딱 이번 한번 뿐이었다

.

■‘입조했다’ 치고 철수

이때 고려는 하공진(?~1012)과 고영기(미상)을 거란 진영에 보내 강화를 요청합니다.(12월30일)

“국왕(현종) 진실로 와 뵙기를 원했지만 거란 군대의 위세가 너무 강성한데다…멀리 강남 지역으로 피란가셨습니다….”

이때 거란측이 “지금 고려 국왕이 어디 있냐”고 묻자 하공진은 “왕(현종)이 간 강남은 매우 멀어서 몇 만리가 되는 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고려사절요> 1011년 1월3일자는 “거란 성종이 철수를 허락하면서 하공진 등을 억류했다”고 했습니다.

<요사>는 “고려가 ‘요(거란)군이 철군하면 고려 국왕이 요에 입조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현종이 거란 황제에게 ‘언제 어떤 형식으로 입조하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거란군이 철군합니다. 하공진 등이 찾아오자 철군의 명분을 찾느라 골몰하던 거란 성종이 ‘옳다구나’ 싶어 덥석 강화를 받아들인 인상이 짙어요. ‘입조했다’고 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철군해버린 것 같아요.

거란측 사서인 <요사>도 “고려가 한번 싸워 패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항복(강화)를 요청하는 것은 속임수”라고 경계했습니다. 거란측도 고려가 거짓으로 강화를 요청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는 하공진의 살신성인 외교가 돋보인다. 하공진은 ‘현종이 거란 성종에게 조회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거란군의 철군을 성사시켰다.내심 철군의 명분을 찾고자 했던 거란 성종이 하공진 등이 찾아와 ‘철군과 입조’ 운운하자 기다렸다는 듯 철군한 것으로 보인다. 인질로 잡혀간 하공진은 훗날 귀국하려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올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그렇게 쫓기듯 철군하는 적군을 그냥 보내줬을까요. 아니죠.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정리해보죠.

1월17일 귀주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사를 쳐서 1만여 수급을 베었구요.

18일부터 주인공인 양규 장군이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18일 양규가 거란군사를 무로대에서 습격했다. 거란군 수급 2000여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000여명을 구했다.”

“19일 양규가 이수에서 석령까지 추격하며 수급 2500여급을 베고 백성 1000여명을 빼앗았다.”

“22일 양규가 여리참에서 수급 1000여급을 베고 남녀 1000여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번 싸워 모두 이겼다.”

“28일 양규가 애전에서 거란의 선봉을 공격해서 1000여급을 베었다. 얼마후 거란 군주가 이끄는 대군을 맞아 양규과 김숙흥이 하루종일 싸우다가…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양규 장군과 그 휘하 장수들의 활약상을 전한 <고려사> ‘열전·양규’. 양규 장군은 전쟁 개막전인 흥화진 전투에서 성을 지켜낸 것을 비롯해, 빼앗긴 곽주성을 탈환하고, 후퇴하는 거란군을 무로대, 이수~석령, 여리참, 애전 등에서 잇달아 무찌른 뒤 김숙흥과 함께 전사했다. 양규 장군은 특히 포로로 집힌 3만여명의 백성들을 구출했다.

 

<고려사절요>는 양규의 활약상을 제대로 정리합니다.

“양규는 후원군도 없는 의로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한 달 만에 7번 싸워 거란 군사들을 다수 죽이고 사로 잡혀있던 백성 3만여명을 구해냈다”면서 “낙타와 말, 무기 등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고 전했습니다.

<고려사절요>는 “거란군사는 고려의 여러 장수들에게 공격받은 데다가 큰 비로 인해 말과 낙타가 지쳐 무기를 모두 잃었다”고 첨언했습니다. 양규·김숙흥 장군이 전사한 뒤에도 고려군은 거란군이 그냥 압록강을 건너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29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반쯤 건너려 할 때 흥화진사 정성(미상)이 공격했다.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에 매우 많았다.”

양규 장군이 한달 사이 7전7승의 신화를 이뤄냈고요. 그 휘하인 김숙흥과 정성 등도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양규 장군이 거란 군대를 공격한 뒤 3만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해냈다는 것이 심금을 울립니다.

거란군에 의해 붙잡혀 고초를 겪고 이역만리 거란땅으로 끌려갈 운명에 처해 있던 백성들을 구해낸 겁니다. 이것이 양규 장군이 퇴각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한 으뜸 이유일 겁니다.

양규 장군 등이 거란군을 무찌른 전투장소를 특정하기가 어렵다. 각 연구마다 전투장소를 추정한 지도 및 그림이 약간씩 다르다.

 

■갈 때는 곱게 못보내준다

왜 그런 말이 있죠. “올 때는 그냥 왔지만 갈 때는 니네 마음대로 못간다”는 말이요.

거란군이 바로 그 꼴이 된 겁니다. 오죽하면 송나라 사서인 <송사> ‘고려’는 “고려 현종이 기이한 대책을 세우고 공격해서 침략한 거란군을 다 죽였다”고 평가했겠습니까. 황제의 체면에 톡톡히 ‘스크래치’가 난 거란 성종은 어찌되었을까요.

1012년 4월과 7월19일 두차례에 걸쳐 고려에 “약속대로 친조하라”(<고려사>)고 재촉하는데요.

그러나 현종은 요즘 말로 ‘뭐래?’를 외쳤을겁니다. 고려는 “왕(현종)이 지금 아파서 친조하지 못하겠다”(<고려사>)고 점잖게 거절하는데요. 그러자 거란 성종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렇다면 고려가 차지한 강동 6성까지 빼앗으라”고 하는데요.

그게 어디 쉽습니까. 유야무야되고 말았죠. 그럼에도 정신을 못차린 거란(요)은 1018년 3차 침공을 감행하죠.

 

그러나 그때는 3차전의 주인공인 강감찬의 흥화진·귀주대첩 등에 힘입어 10만 거란군 중 불과 수천명이 살아돌아갔다고 하죠. 거란의 침략야욕은 이것으로 완전히 마침표를 찍게 되었구요.

저는 이번에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 분들 대부분이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는 ‘뭇 영웅’으로, 겨우 이름 석자만 남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름 석자라도 남은 분들은 그나마 다행이죠. 이름없이 빛도 없이 싸우다 스러진 장수와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이 기사를 위해 문경호 공주대 교수와 허인욱 한남대 교수가 도움말을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방부전사편찬위, <여·요 전쟁사>(민족전란사 7), 1990

문경호, ‘북방 유목사회의 특성과 고려-거란 전쟁’(귀주대첩 1000주년 강감찬 축제 학술대회 발표문), 한국중세사학회, 2019

안주섭, ‘고려-거란 전쟁사 연구’, 명지대 박사논문, 2001

허인욱, ‘거려-거란의 압록강 지역 영토 분쟁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2012

허인욱, ‘유목사회의 특성과 고려-거란 전쟁’, <한국중세사연구> 60권, 한국중세사학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