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로 삼았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
신라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웅변하는 고고학·역사학 자료는 많다. 예컨대 보량이라는 여인은 제22대 풍월주(화랑도의 수장·재임 637~640)인 양도공을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어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양명공주)가 같은 남매사이였다. 양도공이 남매간의 혼인을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꺼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을 껴앉고 말했다.
“신국(神國·신라)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예로 하겠느냐.”(<화랑세기>)
신라의 자유로운 성풍습을 ‘신국의 도’라 한 것이다. 특히 성에 관한 한 여성 상위였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미실은 임금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 1명(동륜),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을 성의 노리개를 삼은 여인이었다.
정식 남편인 세종은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켰고, 사다함은 지독한 상사병에 시달린다. 미실은 ‘남자를 녹이는’ 방사술을 배웠고, 진평왕에게는 ‘신국의 도(성교육)’를 가르쳤다.
<삼국유사> ‘김현감조’는 “탑돌이 하던 김현이 여자와 눈을 맞춘 후 구석진 곳에서 통정했다”고 기록했다. “다리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이냐”고 한 처용가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고 한 서동요 역시 당대의 성풍속도를 웅변해준다. ‘돌기 달린 목제 남근’(안압지)과 ‘성 묘사 토우들’(미추왕릉·계림로 30호 고분군 등)도 ‘남녀상열지사’의 유물들이다. 엉덩이를 치켜든 여인, 그리고 과장된 남근을 들이미는 남자, 그리고 그 남성을 돌아보며 희죽 웃는 여인….
최근 경주 황남동 적석목곽분(5세기)에서 30대 귀족여성과 20대 남성의 인골이 완전히 포개진채로 발견됐다. 금은 장신구·말갖춤새 등을 갖춘 여성과 달리 남성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몸종 혹은 마부였을까. 그러나 여성 주인공 바로 옆에 남성을 순장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저 남자는 저 지체높은 여성의 애인이었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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