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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해인사 폭격멍령을 거역한 김영환 장군 유품이 문화재된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6·25전쟁 당시 공군 초대 10전투비행전대장이던 김영환 장군(1920~1957)은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영환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붉은 색으로 도색한 전투기를 타고 80여 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한 독일 공군의 에이스 만프레도 폰 리히토벤을 흠모했다. 그러던 김영환 장군이 형수가 만들어준 자주색 마후라를 두르고 다니면서 ‘빨간 마후라’가 일약 한국 공군에서 유명해졌다.  

공군 창설과 발전의 중심인물이면서 해인사 폭격명령을 거부해서 해인시와 고려대장경을 구해낸 김영환 장군의 명패. 이 명패는 해안사 폭격명령을 거부했을 당시의 명패이다.|문화재청 제공 

여기에 1964년 전투조종사를 소재로 한 ‘빨간 마후라’ 영화가 상영됨으로서 영화주제곡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때부터 빨간 마후라가 공군조종사를 지칭하는 상징이 됐다. 비행교육과정을 수료한 조종사들에게 조종 흉장과 함께 참모총장이 직접 빨간마후라를 수여하는 전통이 이어졌다그런데 김영환 장군에게 ‘빨간 마후라’를 능가하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더 있다. 바로 해인사 폭격작전을 거부함으로써 해인사 장경판전과 고려대장경을 지켜낸 것이다. 문화재청이 엮은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2009년 개정판)에 따르면 1951년 9월18일 낙오된 북한군 900여 명이 해인사로 몰려들었다. 

공군 제10전투비행단의 주요활동을 연원일 사건제목, 출동, 비행훈련 등을 요약한 군사자료.|문화재청 제공

이때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을 받는다. 김영환을 편대장으로 한 제10전투비행전대의 폭격기 4대는 기관총 뿐 아니라 폭탄과 로켓탄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히 김영환 대령의 폭격기에는 ‘네이팜탄’도 적재돼 있었다.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발사해서 북한군을 쓸어버릴 작전이었다.

그러나 김영환 대령은 “내 명령 없이는 절대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폭력을 인도한 정찰기가 “편대장은 무엇하는가. 빨리 폭탄을 투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김영환 대령은 사찰 상공을 몇차례 선회한 다음 해인사 뒷산 너머로 폭탄과 로켓탄을 투하하고 귀대했다.

6·25  전쟁 당시 임상섭 조종사가 작성한 비행기록 수첩과 지도. 전투기를 비행한 날짜와 기종, 횟수, 출격지점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문화재청 제공

김영환 대령은 귀대후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냐”는 추궁을 받았지만 “사찰이 국가보다는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공비보다는 더 중요하다”고 분명히 대답했다. 

문화재청의 <수난의 문화재> 개정판은 “김영환 대령은 사찰을 파괴하는 데는 하루면 족하지만 해인사 같은 사찰을 세우는 데는 천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마무리지었다. 해인사 입구에는 2002년 김영환의 공적을 기리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건립됐다. 김영환 장군은 1954년 3월 5일 F-51(무스탱)기로 사천기지를 이륙하여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기상악화로 동해안 묵호상공에서 실종됐다. 김 장군은 실종 3년 후 정식으로 사망처리됐다.  

해마다 해인사에서 열리는 김영환 장군 추모재.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구한 영웅으로 알려져있다.|해인사 사진자료 

물론 김영환 장군의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김영환 장군 주변 사람들과 해인사 스님들은 한결같이 ‘김영환 편대장=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위대한 군인’으로 알고 있다. 2009년 이 사실을 규명하기 위한 공군 차원의 역사자료발굴위원회가 구성됐다. 6·25 전쟁 때 100회 이상 출격한 조종사 등 1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는 ‘김영환=해인사 구한 인물’로 규정했다. 

“당시 김영환 전대장이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해인사를 공격할 뻔했어’라 했다. 그땐 무슨 이야기인 줄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박재호 예비역 장군)

“사천기지에 근무했을 때 김영환 전대장으로부터 ‘야, 오늘 내가 절을 공격할 뻔 했어, 큰 일 날 뻔 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배상호 예비역 장군)    

조종사 출격일지. 목표공격의 요령까지 자세하게 적혀있다.

문화재청은 김영환 장군이 이끈 공군 제10전투비행단 관련 군사기록물 등 6·25 전쟁 유산 3건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24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또 ‘인천 팔미도 등대’를 사적으로 지정했으며, ‘6·25전쟁 군사기록물(육군)’을 등록문화재로 등록했다. 이중 공군 관련 자료는 전쟁 당시 공군 제10전투비행단과 관련된 유물이다. 제10전투비행단 종합보고서와 비행 기록 수첩 및 출격 표시 작전지도, 10비 군사일지, 조종사 출격일지, 김영환 장군 명패 등 총 6건(8점)이다. 이중 ‘제10전투비행단 종합보고서’는 비행단의 작전·정보·교육·기상 등 작전 요소를 망라하여 도면과 문서로 정리한 유물이다. 한국군과 북한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비행기록 수첩 및 출격 표시 작전지도’는 참전 조종사(임상섭)가 1952~53년 사이 작전을 수행한 지역을 수첩에 기록하고 지도에 표시한 유물이다. 당시 연습 및 출격기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10비 군사일지’는 부대의 주요 활동을 날짜 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조종사 출격일지’는 참전 조종사(이배선)가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출격일시·목표지점·임무·작전지도·마음가짐 등을 일자별로 상세히 기록했다. ‘김영환 장군 명패’는 초대 10전투비행전대장 시절(1951년 8~11월 10일)에 조종사 일동이 제작한 것이다. 이 유물들은 해당 유물들은 6·25전쟁 시 공군의 작전수행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희귀하며, 역사적·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백마고지 전투상황도.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혈전을 기록했다.

이번에 발굴된 육군기록정보관리단 소장 ‘전쟁 군사 기록물(육군)’(등록문화재 제787호)은 전쟁 발발부터 정전 협정까지 군사작전 기록물로 치열했던 격전의 현장이 담겨있다. 이번에 등록과 함께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전쟁 기간 동안 육군본부·군단·사단·후방부대 등에서 작성한 이 기록물은 전투 수행을 위해 구체적으로 하달한 계획·명령·지시 기록과, 전투 상황에 대해 상세히 보고한 전투상보·작전일지 등 총 15종 7521건이다. 

해당 유물은 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피의 능선, 백석산 전투 등 치열했던 격전의 현장과 작전요도, 적군현황, 전투경과, 병력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물은 25일부터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에서 검색 및 활용이 가능하다.

사적으로 지정예고된 ‘인천 팔미도 등대’. 1903년 세워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때 연합군 함대의 길을 인도한 역사적인 등대이다.|문화재청 제공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예고된 ‘인천 팔미도 등대’는 1903년에 세워진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근대식 등대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함대를 인천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인도함으로써 6·25전쟁의 국면을 일시에 뒤바꾸는 데 기여했다.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된 ‘근대기 제작 조선왕조 어진’은 태조어진(홍룡포본)·원종어진·순조어진·순종어진 총 4건(4점)이다. 해당 유물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소개된 후 보관창고 화재로 상당부분 훼손됐다. 그러나 여전히 용안의 일부와 곤룡포·신발·용상·채전 등의 색채와 문양 등이 잘 보존되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보병과 더불어 악보’는 전쟁 당시 마산으로 피난했던 작곡가 이상근(1922∼2000)이 칸타타 형식으로 작곡한 작품(친필악보)이다. 해당 유물은 전쟁을 직접 경험하고 그 경험을 작품으로 완성하여 전쟁 당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