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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600년 도읍지 한양, 동전던지기로 낙점된 사실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로운 도읍지가 된 한양(서울)이 어떻게 낙점되었는지 아십니까. 원래의 유력후보지가 계룡산이었다가 한양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죠.

또 한양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정할 때 궁성의 방향을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죠.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의 주장에, 정도전이 “그리되면 임금이 동쪽을 향해 앉게 되는 것”이라면서 “자고로 군주는 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한다”고 응수한거죠. 지금의 청와대·경복궁처럼 북악산을 진산으로 해야한다는 거죠. 

여기서 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자기 주장이 ‘킬’되자 무학대사가 “200년 뒤 내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말…. 200년 뒤라면 바로 임진왜란(1592년)을 가리키죠. 차천로의 <오산설림>에 언급된 일화죠. 

한양도성과 무악을 도읍지로 했을 때의 무악도성 상상도. 한양은 뒤로는 북한산 도봉산, 앞으로는 남산이 가로막고 있지만 무악의 앞에는 한강이 마치 보름달처럼 감싸고 있는 형국이라서 길지라는 해석이 있다.|지종학·박종민의 논문에서


■순탄치않았던 한양천도

이렇게 한양천도를 둘러싸고 여러 이야기가 돌지만 막상 그 중요한 한양 천도가 ‘동전던지기’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것도 야사가 아니라 <태종실록> 1404년 10월6일자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법한 이야기죠. 1990년 청와대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장 뒷편 북악산 산기슭의 바위에서 ‘천하제일복지’라 새긴 글자가 발견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명당자리라는 건데요. 정말로 청와대와 경복궁이 들어선 구역은 고려시대부터 길지로 각광 받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1067년(문종 21년)에는 고려 3경(개경·서경·남경) 중 남경으로 발돋움했고, 고려 말(1382년) 우왕은 실제로 5개월간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적도 있었습니다.

청와대 뒷편 북악산 기슭의 바위에 새겨진 ‘천하제일복지’ 글씨. 청와대 경복궁 터는 고려시대부터 명당으로 꼽힌 곳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렇다면 한양 천도는 막 개국한 조선 왕조로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답니다. 개국하자 마자 유력후보지였던 계룡산이 제외되고 새로운 후보지로 무악(母岳·신촌 연희동 일대)과 한양(경복궁)이 거론됩니다. 특히 개국공신이자 천문에 밝은 첨서 중추원사 하륜(1347~1416)은 “나라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믿을 만 하다”면서 무악을 추천합니다. 무악은 지금의 안산(해발 295.9m)의 옛 이름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무악 땅은 도읍지로서는 너무 좁다”고 반대표를 던집니다. 1394년(태조 4년) 8월 무악을 직접 둘러보고 남경(한양)을 거쳐 송도로 돌아오던 태조는 고심 끝에 ‘한양’을 새도읍으로 낙점합니다. 태조가 “그래도 풍수지리상 송도(개경) 다음으로 남경을 꼽을 수 있다”고 아뢴 지관 윤신달의 말을 듣고 무학대사와 다른 재상들의 동의를 얻어 ‘한양 천도’로 최종 결정한 겁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답니다. 천도 4년 만인 1398년(태조 7년) 다름아닌 경복궁에서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주도로 제1차 왕자의 난이라는 피바람이 불었으니까요. 동생의 권유로 얼결에 즉위한 정종(1898~1400)으로서는 방석(?~1398)과 방번(1381~1398) 등 비명에 간 이복 동생들의 원혼이 떠올랐을 겁니다. 결국 천도 4년 4개월만인 1399년 2월26일 개경으로 환도합니다. 

동전던지기로 조선의 도읍지로 확정된 한양. 그러나 북악산의 얼굴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형국(원안)이어서 풍수상 불안하다는 평을 받았다. |연합뉴스


■무악이 유력후보지로 급부상했지만…

그러나 왕자들 간의 권력 다툼이 어디 개경 환도로 진정될 수 있었겠습니까. 환도한지 1년도 안된 1400년 1월28일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그 결과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이 등극합니다. 그 과정에서 밤마다 부엉이가 울고, 까마귀와 들까치떼가 모여들었으며 여우가 궁궐에 들어오는 등 괴상망측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설상가상으로 1400년(정종 2년) 12월 2일 임금이 머물렀던 개경의 수창궁이 불에 탑니다. 

태종은 한양과 개경 등 두 개의 도읍을 두는 방안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부왕(태조 이성계)가 “이미 한양에 도읍을 정한 바 있는 내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거냐”는 강경한 뜻을 밝히자 ‘앗 뜨거!’하고 한양 재천도를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이때 “기왕 다시 재천도를 생각하는 김에 다시 무악을 고려해달라”는 진산부원군 하륜의 상소가 올라옵니다. 태종은 최측근 참모인 하륜의 청을 묵살할 수 없었죠.

1404년(태종 4년) 10월 4일 태종은 하륜과 조준(1346~1405) 등 재상들과 윤신달·유한우 등 지관들을 대동하고 다시 무악 답사에 나섭니다. 태종은 무악(안산)의 중봉에 올라 한강변에 백기를 세우게 한 뒤 지점을 표시해가며 사방을 살폈습니다. 태종은 새삼스레 윤신달 등 지관들에게 “무악과 한양 중 어디가 낫냐”고 하문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지관들은 10년 전(1394년) 태조의 무악 답사 때와 정반대로 “한양은 결함이 많고 무악이 매우 좋다”고 대답합니다. 풍수적으로는 “한양은 앞뒤가 돌산이고 험한데 물이 끊어지니 도읍이 될 수 없지만 무악의 눈앞에는 세 개의 강이 보름달처럼 잡아당기니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아뢰었습니다. 태종은 빈정이 상했습니다. 그렇게 한양보다 무악에 좋다면 부왕(태조) 시절인 1394년 맨처음 천도할 때 “무악이 좋다”고 주장할 일이지 왜 그때는 “‘한양이 낫다’고 딴소리했냐”고 지관들을 질책합니다.

고려 475년의 도읍지인 개경 고려궁성터. 태조 이성계가 조선개국과 함께 한양으로 천도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불안에 떨었던 정종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러나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재차 천도가 논의된다. |박성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제공    

■‘2길(吉) 1흉(凶)’ 한양의 승리

태종은 결국 “(맨처음 도읍지였던) 한양에도 한번 가보겠다”고 어가를 돌립니다. 1404년(태종 4년) 10월6일 어가는 맨처음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조상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 문밖에서 멈춥니다. 이때 태종이 아주 흥미로운 결정을 내립니다. “종묘에 들어가 송도(개경)와 한양, 무악 등 도읍지 후보 세곳을 두고 점을 쳐서 결정하겠다. 그렇게 결정된 뒤에는 어떤 사태가 발생해도 더는 왈가왈부하지 마라”는 명을 내린 겁니다. 그렇다면 점은 어떻게 치느냐. 새 도읍지의 운명이 갈린 1404년 10월 6일의 이야기가 <태종실록>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방식인 복서( 卜筮)가 제안되었습니다. 

즉 거북등이나 동물뼈를 태워 ‘쩍’ 하고 갈라지는 금의 모양을 보거나, 혹은 톱풀이나 깎은 대나무의 줄기(시초·蓍草)로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이죠. 그러나 태종은 “요즘 복서로 점 치는 예가 거의 없지 않느냐”고 달가워하지 않았답니다. 신하들 중에서도 ‘그렇게 나온 점궤를 해석하는 것도 논란만 낳을 수 없다’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여러 사람들이 쉽게 그 점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척전(擲錢·동전던지기)’가 어떠냐”면서 옆에 서있던 좌정승 조준에게 “고려 태조(왕건)은 도읍을 정할 때 무슨 물건으로 하였느냐”고 물어봅니다.

조준은 “태조 왕건도 개경(송도)를 도읍지로 정할 때 “역시 동전던지기(擲錢)을 썼다”고 대답합니다. 

조선의 도읍지가 무악으로 결정됐다면 거론될 수 있는 도성의 배치 상상도. 궁궐은 연세대 자리, 종묘는 이화여대 부근이 유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지종학·박종민의 논문에서 

“그래? 그럼 우리도 동전던지기로 해보자.”

그렇게 결정한 태종은 여러 신하들을 대동하고 예배를 드린 뒤에 종친(태조 이성계의 조카)인 완산군 이천우(?~1417)와 조준 등을 이끌고 종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다음 향을 올린 다음 꿇어앉았고, 왕명을 받은 이천우가 쟁반 위에 동전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한양은 ‘2길(吉)1흉(凶)’, 즉 2가지가 ‘길’하고 한가지가 ‘흉’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송도(개경)과 무악(毋岳)은 둘다 ‘2흉 1길’로 나왔답니다. 태종은 이 결과에 따라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을 최종 낙점합니다. 그러면서 향교동 동쪽에는 이궁(離宮·창덕궁)을 짓도록 명합니다.

그런뒤 알쏭달쏭한 한마디를 남깁니다. “난 무악(毋岳)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후세에 반드시 그곳(무악)에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에 통용된 조선통보.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아니 왕조의 운명이 달린 도읍지를 택하는데 동전던지기가 웬말입니까. 그래도 되는 겁니까. 뭐 그런 의문점이죠. 그러나 동전던지기, 즉 척전도 점의 한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돈점’이라고도 한다는데요. 세 번 던져서 하나의 궤를 만들어 길흉(吉凶)을 판단했답니다. 아무렇게나 정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역>의 궤에 따라 점을 쳤다니까 그렇게 터무니없는 방법은 아니었죠. 

한가지 이상한 것은 “고려 태조 왕건도 동전던지기로 도읍을 정했다”는 조준의 언급인데요. 이건 금시초문입니다. 그래서 태종이 ‘한양’을 미리 낙점해두고 조준 등과 ‘짜고치는 고스톱’을 펼친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답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점을 쳐서 나온 궤사(점궤를 풀어놓은 글)나 거북등의 갈라진 틈과 달리 동전던지기는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으니까요. 또 아주 단순하지만 결과가 담백하게 나오는 동전던지기를 통해 구구한 논쟁과 우왕좌왕 민심도 한번에 정리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동전던지기로 결정된 ‘한양 재천도’는 이듬해(1405년) 9~10월 사이 일사분란하게 마무리됩니다.

여기서 마지막 남은 의문점 한가지. 태종이 ‘한양’을 최종 낙점하면서 “난 안했지만 후대에는 무악에 도읍을 정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는 겁니다. 태종은 이미 부왕(태조)이 결정한 도읍이었고, 종묘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한양’을 동전던지기라는 기상천외한 점치기로 확정했겠죠. 

그러나 내심으로는 무악을 더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세종(재위 1418~1450)은 상왕(태종)을 위해 연희궁(서이궁)을 무악 쪽에 만들어주었고요. 세종 자신도 부인인 소헌왕후(1395~1446)와 함께 연희궁에 잠시 머문 적도 있답니다. 

연세대 경내에 표시된 연희궁터. 태종은 “나는 비록 무악에 도읍지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는 반드시 이곳을 찾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세종은 상왕이 된 태종을 위해 연희궁을 마련해주었다.|두피디아 

■만약 무악이 도읍지였다면 궁궐은 어디?

지금으로 보면 태종이 무악을 한양보다 매력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양은 물이 별로 없는데다 앞쪽이 남산에 막혀있지만 무악은 앞쪽이 훤하게 뚫려서 한강을 통해 곧장 바다로 나갈 수 있잖습니까. 풍수가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이런 말을 했어요.

“세월이 지나면 수도의 조건도 변하는데, 지금의 서울은 위로는 북한산·도봉산, 아래로는 한강에 가로막혀 더는 클 수 없는 형국”이라고 했어요. 산이 둘러쌓인 곳보다는 평지이면서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뻥 뚫린 곳이 더 도읍지로 적격이라는 얘기죠. 뭐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항만 입지가 뛰어나고 지성(地性)이 관후박대(寬厚博大)한 곳이 풍수상으로도 좋다는 겁니다.

만약 태종이 무악(안산)을 주산으로 도읍지를 정했다면 어땠을까요. 한 연구에 따르면 궁궐의 위치는 지금의 연세대 자리와 그중에서도 언더우드관이 유력하다는군요. 지금의 이화여대 부근에는 종묘가 들어섰을 것이고, 동대문은 만리동고개, 서대문은 망원역 인근, 남대문은 광흥창역 인근, 북문은 연희동 일대에 각각 조성되었을 것이라 하네요.(지종학·박종민의 ‘조선초 하륜의 무악산 숭궐터에 대한 풍수지리적 해석’, <동북아문화연구> 제51집, 2017에서)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