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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대체 '사경'이 뭐길래…화장실 갔다오면 '향수 목욕' 해야 했을까

“‘사경(寫經)’ 제작 전에 대소변을 보거나 누워 자거나 식사를 한 경우 향수로 목욕한 뒤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사경’은 불경을 베껴 쓴 ‘경전’인데요. 754년(신라 경덕왕 13)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사경(<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국보)에는 작업장에 들어가기 전에 치러야 할 경건한 의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초장부터 이상하죠. 
이런 규정이라면 화장실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겠네요. 또하나 인용할만한 기사가 <고려사>에 있더군요. 
유학자 최승로(927~989)가 982년(성종1) 올린 ‘시무28조’ 중 한 대목인데요. 
“신라 말 사경과 불상 모두 금·은을 사용해서 사치가 도를 넘었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그 관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그 폐단을 혁파해야 합니다.”
최승로의 언급이 심상치 않죠. ‘사경 제작’을 신라망국의 원인으로 꼽았네요.
대체 ‘사경’이 뭐 그리 대단한 작업이라고 이렇게 까다롭고, 또 망국의 원인으로까지 운위되면서 구설에 올랐을까요.

■각주 처리된 용어설명만 10개
벌써 4개월이 되네요. 지난 6월15일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에서 환수된 중요한 유물’이라며 뿌린 보도자료가 있습니다. 고려시대 사경(寫經)인 ‘<묘법연화경> 권제6’이었습니다.
제가 그 보도자료를 보고 좀 별난 포인트를 잡아냈습니다. ‘바탕체 14p’로 넉넉하게 쓴 보도자료가 제목까지 해서 2쪽 5줄 정도에 불과했는데요. 그런데 일종의 각주로 처리한 용어 설명만 10개나 되더군요.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처음부터 ‘사경’이니, <묘법연화경>이니 하는 알쏭달쏭한 용어로 시작되거든요. 
쉽게 쓰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보도자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번 다뤄볼까 했다가 차일피일 미뤘는데요. 얼마전 국보인 ‘신라백지묵서’ 내용과 최승로의 ‘사무 28조’를 읽어보고 한번 천착해보기로 했습니다. 

■백연화처럼 올바른 가르침
환수된 사경을 한번 살펴보죠. <묘법연화경>은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음’을 기본으로 한 경전인데요. 
‘백연화처럼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의미랍니다. <법화경>이라고도 하고요. 
환수된 ‘사경’은 <묘법연화경>(총 7권) 중 ‘권제6’(18~23품)에 해당됩니다. 고려말인 14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요. 감색 종이에 금·은니(금 또는 은가루를 아교풀에 개어 만든 안료)로 경전 내용을 필사했습니다.
또 경전 내용을 압축·묘사한 변상도가 4면 구성되어 있는데요. 화면 오른쪽에는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부처와 제자들을, 왼쪽에는 경전의 내용을 그렸습니다. ‘사람들이 성내며 돌을 던져도 ‘그대들은 모두 성불하리라’는 장면과, ‘타오르는 화염 속에 자신의 몸을 바쳐 공양하고 있는 장면’ 등입니다. 이 대목에서 자연 의문이 생깁니다. 

■왜 고달픈 베껴쓰기를?  
도대체 왜 그 어렵고 긴 경전의 내용을 일일이, 그것도 금과 은을 입히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정성스레 옮겨 적었을까요. 
따지고보면 불경 뿐이 아닙니다. 구약 및 신약성서나, 공자왈을 기록한 <논어> 등도 마찬가지죠.
부처님과 예수님, 공자님 같은 분들이 당대에 기록물을 남겼을까요. 그렇지 않죠. 아주 세속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세치혀’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은 분들이었습니다. ‘내 말을 받아적으라’고 하지도 않았죠. 
제자나 후손들이 그분들의 생전 가르침을 기억해서 펴낸 것이 성서·불경·논어 같은 경전입니다. 그 시절 인쇄 기술이 없었으니 그 분들의 ‘말씀’은 자연 ‘필사’로 기록되었죠.
예컨대 구약성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 식물의 줄기로 만든 파피루스에 필사되었고요. 이 파피루스의 중심무역지로 고대 페니키아의 ‘비블로스’가 유명했는데요. 이 지명이 그리스어의 ‘책’으로, 영어의 ‘바이블’로 이어졌다는군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신약성서는 어떨까요. 마가복음은 기원후 69~70년, 마태복음·누가복음은 80년대 전·중반, 요한복음은 90년대에 기록되었다는군요. 공자님의 언행을 담은 <논어> 역시 제자나 후학들이 정리한 것입니다.

■‘이의 없으면 부처님 말씀’
석가모니 부처님 역시 마찬가지였죠, 부처님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스승의 행적이 왜곡되어 전해질까 걱정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른바 ‘결집(모임)’을 거쳐 생전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복원해나갔습니다. 
예컨대 1차 결집 때 10대 제자가 자기가 기억한 부처의 생전 설법을 암송했고요. 
그렇게 암송한 내용이 생전 부처의 말씀이 맞는지 그곳에 모인 500명의 제자(아라한)가 하나하나 검증했는데요. 
500명 중 단 한사람이라도 “이의 있습니다”라고 손들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인정받지 못했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정리된 ‘부처의 가르침’은 훗날 범어(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는데요. 그때 패다라수(야자나무)의 잎에 베껴 쓴 ‘패엽경(貝葉經)’이 최초의 사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경’은 기원후 57년 무렵 중인도 출신 승려 축법란(생몰년 미상)이 42권의 장경을 들고 중국에 들어오면서 본격화됩니다. 

■불교와 전래와 시작된 사경
한반도에는 언제 전래될까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2) 6월 중국 전진(351~394)의 사신 및 승려가 불상과 불경을 가져왔다”(<삼국사기>)는 기록이 있어요. 당대 인쇄기술이 없었으니 그렇게 수입된 불경을 일일이 손으로 베꼈겠죠.
결국 사경의 역사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경’의 본래 목적은 어디까지나 포교였습니다. 그러나 사경 작업이 얼마나 힘듭니까. 
수천, 수만자에 달하는 경전을 필사하는 그 자체가 수양과 공덕 쌓기로 승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묘법연화경>은 “만약…경전을 베껴 쓴다면 무량공덕을 쌓는 일이며 성불(成佛·부처가 됨)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또 <무량수경>과 <도행반야경>은 “경전을 필사하는 일은…불탑을 쌓는 공덕과 같다”고 했습니다. 
<금강경>은 “갠지스강에 칠보탑을 모래알만큼 쌓아도 <금강경>을 필사해서 지니고 독송하며 설하는 공덕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까지 했습니다. 사경을 대중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지만, 중요한 수행방법이라 여긴 겁니다.
여기에 8세기 초·중엽부터 목판인쇄술이 발명·발전하면서 불경의 다량 인쇄가 가능해졌죠.
이때부터 ‘사경’은 포교 보다는 수양과 발원(소원을 빔)의 목적이 더더욱 강조되었습니다.

■화장실 다녀오면 ‘향수목욕’ 해야
현전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 사경’이 있습니다. 
경덕왕대인 754~755년 황룡사 소속 연기법사가 부모를 위해 제작한 <대방광불화엄경>(국보·리움미술관 소장)인데요. 
그냥 <화엄경>으로 일컬어집니다. 이 경전은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사경은 자색 닥나무 종이에 금은니로 변상도를 그리고, 먹글씨로 경문(화엄경)을 쓴 ‘두루마리’입니다. 
신장상·불보살·꽃·풀 등이 그려진 표지 그림도 있습니다. 단순 ‘포교경’에서 ‘공덕경’을 넘어 ‘장식경’으로 진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국보사경이라 합니다.

이 사경의 말미에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사경 제작과정’과 ‘제작자의 언행 및 절차’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사경 제작 그 자체가 뼈를 깎는 수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종이·필사·그림 등을 담당한 모든 작업자들은 보살계(불교에서 보살이 지켜야 하는 계율)를 받게 했습니다. 만약 작업전에 용변을 봤거나 밥을 먹었거나 잠을 잤거나 했으면 반드시 향수 목욕을 향한 다음에 입장이 가능했답니다.  
작업장 가는 길은 더욱 엄숙했습니다. 앞장선 청색 옷 입은 동자 2명과, 기악인 4명, 향로를 받들고 범패(불교음악)를 부르는 승려, 향화를 든 필사자 등을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정성껏 다해 만들었으니 어떨까요. 
<대방광불화엄경>은 “…설사 대천세계(大千世界·끝없는 세계)가 부서져도…필사한 사경은 허공처럼 파괴되지 않는다…중생이 이 경에 의지하여…용맹정진하고…기원·수행하면 성불한다”고 기원했어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사경인 <대보적경>(일본 문화청 소장·국립교토박물관 보관). 사경의 발원자는 고려 5대 임금인 경종(975~981)의 부인이자 7대 목종(997~1009)의 어머니인 천추태후 황보씨(964~1029)와 그의 애인인 김치양(?~1009)이다.

■천추태후와 애인의 ‘사경’
이 정도였으니 사경제작에 드는 물적·인적 자원도 대단했겠죠. 
그래서 고려초 유학자 최승로가 ‘사경의 혁파’를 요구한 겁니다. 그러나 당대 고려사람들은 ‘뭐래?’ 하고 무시한 것 같습니다. 현재 일본 교토(京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사경 <대보적경>을 볼까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사경인데요.
사경의 발원자는 천추태후 황보씨(964~1029)와 그의 애인인 김치양(?~1009)입니다. 천추태후는 5대 경종(975~981)의 부인이자 7대 목종(997~1009)의 어머니죠. 18세로 즉위한 아들(목종)을 대신해서 섭정한 분인데요. 
글쎄 이 분이 천추전을 드나들던 김치양과 사귀어서 아들을 낳았답니다. 두 사람은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모의했습니다. 결국 1009년(목종12) 강조(?~1010)의 정변으로 김치양과 그 아들이 죽임을 당했고요. 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 마저 폐위되죠. 그런데 이 사경 <대보적경>의 발문에 ‘천추태후와 김치양’, 두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고려에서도 사경을 호화롭게 제작하는 풍조가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무뢰배들이 사경제작을 위해 거둔 금품을 보관한 사경원의 불을 지른 일도 있었다.

이 사경은 1006년(목종 9)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천추태후가 아이의 장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최승로 같은 이가 목소리를 높여도 천추태후 같은 ‘높으신 분들이’ 호화 사경을 제작했으니 어떻게 막겠습니까. 이후 각 개인들도 ‘무명장수’와, 죽은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앞다퉈 사경을 만들었습니다.
1181년(명종11) <고려사>는 의미심장한 기사를 썼습니다. 
“명종(1170~1197)이 ‘은(銀) 글씨로 대장경을 사경하라’고 명하자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돈과 재물을 기부했다. 그런데 이를 노린 무뢰배들이 기부 물품을 훔치려고 사경원에 불을 질렀다.”(<고려사> ‘세가·명종’조)

고려의 사경제작 솜씨는 원나라에서도 알아주었다. 원나라 황실은 수시로 고려의 사경승을 징발 혹은 초빙해갔다.

■‘충’자 돌림 왕들의 ‘사경’ 사랑
사경의 전통은 후기인 충렬왕(1274~1308) 이후에 더욱 번성합니다. 충렬왕이 누구입니까. 
1274년 원 세조(쿠빌라이·1260~1294)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홀도로게리미실·1259~1297)와 혼인한 분이죠. 고려는 본격적으로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로써 고려왕실과 권문세가에서 몽골(원)의 관습을 좇은 풍조가 유행했고요. 그런데 그 ‘충’자 임금의 첫번째인 충렬왕 부터 ‘국왕 발원’은 물론 ‘개인 발원’의 사경이 더욱 화려해졌답니다.
이때 충렬왕은 국가 전담 사경 제작 기구(금자원·은자원) 등을 통해 국왕 차원의 사경을 제작합니다. 
그렇게 제작된 국왕 발원 사경이 현전하는 것만 10점에 이릅니다. 그중 1285년(충렬왕 11) 제작된 <묘법성념처경>이 눈길을 끕니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 황제(세조)를 위해 제작한 사경이거든요. 금으로 필사한 대장경입니다.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단적으로 일러주는 사경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경 <화엄경 보현행원품>(국보). 보현보살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을 설법한 ‘보현행원품’ 부분이다. 기년의 첫 글자가 ‘至(지)’인 것을 볼 때 고려 말인 지정(至正) 연간(1341~1367)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가 수백명씩 모셔간 사경승  
고려의 사경제작 기술은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원나라가 글씨를 잘 쓰는 승려, 즉 ‘사경승’을 수십~수백명씩 징발했다는 기사가 줄을 잇습니다. 
특히 1290년(충렬왕 16)에는 3~8월 사이에 세번에 걸쳐 100명 이상의 고려 사경승(사경 전문 승려)가 원나라 세조의 ‘명’으로 원나라로, 원나라로 향했는데요. 그 이유를 대구 동화사 홍진국사비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충렬왕 16(1290) 원나라에 파견된 100명의 사경승이 다음해(1291) <금자 대장경>의 필사를 완성했다.”
그 후에도 고려 사경승의 초빙은 계속되고요. “1311년(충선왕3) 원나라 황태후가 ‘고려가 ‘사경’을 제작해서 바친 것을 격려한다‘면서 보초(원나라 지폐) 5800정을 하사했다”는 <고려사절요> 기사가 보입니다.  
고려의 사경제작술이 원나라를 압도했음을 알 수 있죠.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사경’(<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은 충선왕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발원자의 이름이 ‘이야선불화(李也先不花)’라 적혀있다. 이 이름이야말로 ‘원나라 간섭기판’ 창씨개명이라 할 수 있다.

■사경에서 보이는 원나라 창씨개명자들 
원나라에게까지 알려진 그 자랑스러운 ‘사경’이 고려에서도 대유행했겠죠.
게다가 원나라에 빌붙어 세도를 부린 부원파·친원파들은 개인 차원에서 사경을 앞다퉈 제작했을 겁니다. 
현전하는 고려사경 중에 그런 작품이 제법 있습니다. 1294년(충렬왕20) 제작된 사경(<묘법연화경>(일본)의 발원자는 제국대장 공주의 측근으로 보이는 ‘안절’입니다. 안절은 발원문을 쓰면서 ‘(원)황제만년’을 ‘국왕’(국왕천추)나 ‘부처(불일증명·佛日增明·부처님의 광명이 더욱 밝아짐)’보다 앞에 세웠습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사경’(<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은 충선왕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발원자의 이름이 ‘이야선불화(李也先不花)’라 적혀있습니다. 이 이름이야말로 ‘원나라 간섭기판’ 창씨개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원문에는 ‘(원)황제의 치세가 영원히 공고해지기를 빈다’는 뜻의 ‘황도영고(皇圖永固)’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소장 사경 <대방광불화엄경 권15>. 1334년(충숙왕 복위 3)에 감색의 종이에 금니로 쓴 <화엄경>이다. 역시 발원자는 영록대부 휘정사 직책을 갖고 있던 ‘정독만달아(鄭禿滿達兒)’라 했다. 역시 창씨개명자이다.

또 개인소장 사경(<대방광불화엄경> 15권) 역시 창씨개명자인 ‘정독만달아(鄭禿滿達兒)’가 발원한 겁니다. 
1315년(충숙왕2) 제작된 사경 <묘법연화경>(일본)의 발원자는 ‘원나라 자선대부 전서원자 궁정’인 ‘신당주’라는 인물인데요. 막강한 권세의 소유자인 원나라 황실의 고려출신 환관일 가능성이 짙답니다. 
이밖에도 고려 후기 ‘사경’을 발원·제작한 이들은 당대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던 부원·친원파가 상당수입니다.
오죽하면 1391년(공양왕 3) 도당(최고의정기관)에서 왕에게 ‘권문세족들이 금과 은으로 사경하는 풍습을 금지하게 해달라’고 청했겠습니까.(<고려사> ‘지·형법·금령’조)   
이번에 구입환수된 ‘사경’ 역시 14세기 중반 혹은 후반 작품으로 평가되는데요. 
누구의 소원을 담은 작품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어디엔가 남아있을 마지막권(<묘법연화경> 권제7)에 발원문이 존재하겠죠. 아마도 고려말 부와 권세를 누린 인물 중에 한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참 아이러니 한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최승로 같은 이가 사치스러운 사경제작 풍조를 개탄했지만, 어찌보면 그러한 ‘호사’ 때문에 700년 후 후손들이 그 화려한 고려불화를 감상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 담겨있는 영욕의 역사 또한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이 기사를 위해 김종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삼성문화재단의 양성일 책임은 사진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종민, ‘조선시대 사경연구’, 대구가톨릭대 박사논문, 2007
권희경, ‘고려 개인발원 사경’, <한국기록관리학회지> 6권1호, 한국기록관리학회, 2006
이은희, ‘고려 충렬왕대의 사경연구’ <문화재> 20권, 국립문화재연구소, 1987
조길제, ‘고려후기 발원 사경 연구’, 원광대 석사논문, 2013
박윤만, ‘초기(기원후 2-3세기) 교회의 성경 책 이해-코덱스(Codex) 선호의 배경과 의미’, <신약연구>17권1호, 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 2018
 황수영, ‘사경의 역사, <불교미술>7호, 동국대박물관,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