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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무령왕 부부 3년상 완전복원…제사상에 은어3마리 올린 이유

“영동대장군 사마왕(무령왕)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 돌아가셨다. ‘신지(申地)’의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했다. 을사년(525년) 8월12일 대묘에 안장했다.”

1971년 7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출토품은 5000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12건(17점)이나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중 ‘원톱’을 꼽자면 금은으로 치장한 화려한 유물이 아니다. 생뚱 맞지만 ‘돌판’ 2점이다.

무령왕의 발쪽에는 청동거울과 함께 청동신발도 놓여져있었다. 무령왕의 혼을 천상으로 올려줄 승선 도구로 삼은 듯 하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 유물의 ‘원톱’

하지만 예사로운 ‘돌판’이 아니다. 무령왕의 돌판, 즉 무덤 임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묘지석이다.

그 돌판엔 ‘주인공=사마(斯麻)’라고 적혀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무령왕’조를 보라.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라 했고”(501년), “523년 5월 훙(薨·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 고분 중 유일하게 주인공이 “나요!”하고 손들고 나선 최초의 무덤이 출현한 것이다.

무령왕릉 무덤방 입구 쪽에서 확인된 나무판(제사상)과 나무판 위의 제기 자국을 토대로 복원해본 제사상. 가장 큰 두 점의 그릇은 칠기그릇으로 추정된다.|강원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제공

<삼국사기> 기사와 소름 끼치도록 정확히 일치하는 명문 돌판이 1500년 만에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다른 돌판 1장의 앞면에는 ‘땅의 신’에게 무덤터를 사들인 내용을 적은 매지권(토지매매 계약서)이 새겨져 있었다.

돌판 위에는 매매대금을 상징하는 오수전 90매가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 ‘매지권’ 뒷면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무령왕보다 3년6개월 뒤 서거한 왕비의 묘지(죽은 이의 행적을 담은 글)이다.

“무령왕비가 526년 11월 서거했고, ‘유지’(서쪽의 땅)에서 빈(殯)을 치른 뒤 529년 2월12일 대묘로 옮겼다.”

무령왕비가 서거하자 고인이 된 남편(무령왕)의 매지권 돌판을 ‘재활용’해서 뒷면에 왕비의 묘지를 써넣은 것이다.

무령왕릉 안에서는 최소한 4차례 제사를 치른 흔적이 보인다. 왕과 왕비의 시신 앞에서 한번씩, 무덤방 입구에서 한번, 무덤길 앞에서 한번 등이다.|강원표 학예연구관 제공

■무령왕릉 묘지석의 ‘핵심 코드’

이 왕과 왕비의 묘지석에는 간과할 수 없는 코드가 새겨져 있다.

왕과 왕비가 서거 후 27개월(무령왕·523년 5~525년 8월, 무령왕비·526년 11~529년 2월)만에, 비로소 대묘(무령왕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령왕과 왕비가 햇수로 따져 3년상을 치렀다는 얘기다.

올해(2023년)는 무령왕이 서거한지 꼭 1500년이 되는 해가 된다. 마침 국립공주박물관은 523년 5월 서거한 무령왕의 장례를 525년 8월 무덤 안치까지 ‘장례주관자’인 성왕(523~554)의 시선으로 복원하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12월10일)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신원이 밝혀진 능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사마왕, 즉 무령왕과 무령왕비임을 분명히 밝힌 묘지석이 나왔다. 또한 무덤조성을 위해 토지신에게 땅을 구입했다는 ‘매지권’까지 보였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이중 필자의 시선을 잡아끈 장면이 있었다.

성왕이 부모(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안치한 뒤 그 앞에 최소 4차례 제사상을 차려 두 분의 명복을 비는 장면이다.

여기서 잠깐. ‘한국 고고학 발굴의 흑역사’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무령왕릉 발굴이 한창이던 1971년 7월8일 밤이었다.

제대로 된 발굴 경험이 없던 조사단의 우왕좌왕과, 역시 발굴 취재의 노하우가 없었던 기자들의 무리한 경쟁이 어우러져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때 발굴단은 중요 유물을 일단 수습했다. 그러나 바닥에 풀뿌리로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자잘한 유물들을 삽으로 쓸어담아 쌀 포대자루에 넣어 싣고 나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의 서거를 알리면서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자를 썼다. 그러나 당대의 자료인 무령왕의 ‘묘지석’은 ‘천자(황제)의 죽음’을 지칭하는 ‘붕(崩)’자를 사용했다. 백제가 밖으로는 ‘제후’를 칭했지만 안에서는 ‘천자(황제)’를 자처했다는 뜻이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유물더미에서 나타난 은어3마리

그렇게 쓸어담은 잔존 유물의 더미는 30여년이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하나하나 재정리되기 시작됐다.

그런데 흙더미 속에 섞여있던 유물 중 300여점의 물고기뼈가 확인됐다.

이 뼈조각을 하나하나 붙여보니 25㎝ 정도되는 은어 3마리 분이었다.

이 은어뼈 대부분은 청색으로 변색되어 있다. 무령왕의 시신 앞에 제사상으로 쓰인 나무판 조각이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아마 은어 3마리는 제사상 위에 놓인 청동접시에 고이 담겨 있다가 청색으로 변색했을 것이다,

이 은어 3마리는 무령왕의 제사에 쓰인 게 맞다. 왜냐. 회귀성 어류인 은어는 봄에 거슬러 올라와 가을까지 강 중·상류에서 서식하며 성체로 자란다. 그러다가 가을철에 강 하구 및 기수역(강과 바다의 경계면)으로 이동해 산란 후 죽는다.

무령왕과 왕비는 두 분다 3년상을 치렀다. 서거 후 27개월(무령왕·523년 5~525년 8월, 무령왕비·526년 11~529년 2월)만에, 비로소 대묘(무령왕릉)에 묻혔다. 묻힌 땅은 신지, 즉 서남쪽이고, 햇수로 3년간 빈소를 차린 곳은 유지, 즉 서쪽 땅이었다.|국립공주박물관 자료

그렇다면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25㎝ 짜리 은어 3마리는 여름철에 잡은 성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무령왕과 왕비의 매장일자(무령왕은 8월12일, 왕비 2월12일)를 감안하면 어떨까.

은어 3마리는 여름철에 장례를 치른 무령왕을 위한 제사상 차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왜 하필 은어일까. 백제는 물론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 ‘은어’는 단 한번도 출토된 바 없다.

절대다수가 바닷고기이며, 민물고기라고 해봐야 잉어와 붕어 정도이다.

하지만 은어는 맛이 담백하고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살에서 오이향 또는 수박향이 난다. 예부터 왕실 진상품이었다.

무령왕은 유달리 은어라는 생선을 좋아한 임금일까. 아니면 회귀성 어종인 은어를 통해 ‘내세에서도 언제든 돌아와 백제를 위해 힘을 써달라’는 아들(성왕)의 염원이 투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무령왕과 왕비, 매지권의 내용을 토대로 추정해본 무령왕 부부의 빈전 위치. 공산성을 기준으로 무령왕이 서거한 지 27개월만에 ‘신지(서남쪽)’, 즉 지금의 무령왕릉에 묻혔고, 무령왕비가 ‘유지’, 즉 정서쪽에 빈전을 마련한 뒤 역시 27개월 뒤에 남편의 무덤에 안장되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가늠해봤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정리

■나무판에 난 그릇자국의 정체

무덤방 입구에서 출토된 제사상의 흔적도 흥미롭다.

원래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흑칠 나무판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 나무판의 표면에 백색의 둥근테가 그려져 있다는 정도로만 보고됐다. 그런 탓에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것이 제삿상에 놓은 그릇의 밑동이 자국으로 추정된 것 역시 나중의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큰 굽 흔적 2개, 푸른색의 작은 굽 흔적 3개, 굽 없는 그릇 2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2022년 자국에 남아있는 색깔과 출토유물의 재질 및 형태 등을 맞춰본 결과를 토대로 제사상 복원안을 공개한 논문이 발표됐다. 그에 따르면 무덤방 입구의 제사상에는 주칠기와 청동잔, 청동접시가 각각 2점씩 놓여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해발 67m의 야트막한 정지산 정상(800여평)에서 매우 특이한 구조의 기와건물터(7동)이 발굴됐다. 그중 벽체의 흔적 없이 기둥만 3열 45개 박아놓은 건물체가 특히 수상했다. 이 건물체의 안에 시신을 넣은 관 같은 시설물이 놓여있을 가능성이 짙다. 또 건물터 옆에는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추정)가 확인됐다. 제사를 지낸 흔적인 제기도 확인됐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새삼 무령왕릉 유물의 출토상황을 정리하면 무덤방 안밖에서는 최소 4차례에 걸쳐 제사를 올린 것 같다.

우선 525년 8월12일 무령왕 장례 때 왕의 시신 앞에서 1번, 4년 뒤인 529년 2월 무령왕비 장례 때 왕비의 시신 앞에서 1번 등 두차례의 흔적이 나타나있다. 또한 무덤 방 앞에서 주칠기 등을 제사상에 올린 3번째 자취가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왕과 왕비의 장례를 완전히 끝낸 다음 무덤을 폐쇄하면서 무덤길 입구에서 펼친 4번째 제사의 흔적이 있다.

물론 525년 8월 무령왕의 장례 때도 무덤방과 무덤길 입구에서 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4년 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때 무덤을 다시 열면서 부왕의 장례식 때 무덤길에 올렸던 제사상은 치웠을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두 분을 위한 새로운 제사상을 올렸을 것이다.

정지산 빈전(추정)에는 왜계 도기 등 고창과 나주, 고령 등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상당수 보였다. 국내외에서 조문행렬이 이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갱위강국’을 외친 아버지

부모의 장례를 치른 아들 성왕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버지 무령왕(501~523)은 대단한 분이었다. 아버지가 왕위에 올랐던 501년 백제는 풍전등화에 놓여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475)으로 한성이 함락된 후 쫓겨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475~477)과 삼근왕(477~479)이 피살(문주왕)되거나 일찍 죽고(삼근왕)만다. 동성왕(479~501)이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그 역시 귀족세력인 백가에게 살해된다.

이러한 위기에서 왕위에 오른 아버지는 난제를 하나하나 풀었다. 창고를 열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휼했고, 제방 등 수리시설을 확대했다. 당대의 자료인 <양직공도>에 따르면 백제가 반파·탁·다라·전라(이상 가야)와 사라(신라), 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섬진강 유역) 등까지 세력을 떨쳤다.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무령왕 재위 기간에 다시 국력을 회복했다. 무령왕은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갱위강국·更爲强國)”고 당당히 밝힌다

무령왕릉 묘지석에 나왔듯 아버지가 양나라에게 받은 ‘영동대장군’ 작호는 고구려 안장왕(519~531)의 ‘영동장군’(520)에 비해 ‘대’자가 더 붙어있다. 502~512년 사이 백제가 고구려군을 물리친 기록이 <삼국사기>에 여러차례 등장한다.

아버지는 드디어 521년(무령왕 21)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갱위강국·更爲强國)”고 당당히 밝힌다. 그런 아버지가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새 임금이 된 성왕 역시도 앞날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백제의 중흥을 이끌어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그런 뜻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은 아들인 성왕이 성공적으로 치러야 할 첫번째 정치적인 시험대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의 서거를 알리면서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자를 썼다.

그러나 당대의 자료인 무령왕의 ‘묘지석’은 이중적인 자세를 보인다. 즉 중국 양나라의 책봉관작인 ‘영동대장군’의 수식어를 쓰면서도, ‘천자(황제)의 죽음’을 지칭하는 ‘붕(崩)’자를 슬쩍 얹었다. 이게 어떤 뜻인가.

성왕이 중국 양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의식해 ‘제후의 예’를 취하되 내부적으로는 ‘천자(황제)’를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외왕내제(外王內帝)’의 관념이다.

고구려의 장례풍속을 나타내주는 안악3호분 장례행렬도. 고인의 장례행렬에 64명에 달하는 악대와 함께 춤추는 사람들이 동원됐다.|고구려유적유물도감편찬위의 ‘<고구려 유적유물도감(5·6)-고구려편3·4>, 1990’에서

■성왕이 조문객을 받은 빈소

무령왕과 왕비의 묘지석에서 분명히 밝혔듯 무령왕 부부는 별도의 공간에 마련한 빈소에서 3년상을 치렀다.

당대의 사서인 <수서> 등은 “(백제와 고구려의 상장례가 같다고 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안치했다가 3년 후 좋은 날을 가려 장례를 치른다”고 전했다.

660년 무렵 편찬된 <한원>에 인용된 ‘팔지지’는 “백제는 3년간 상복을 입는데 산중에 시신을 매장하는 빈을 행했다”고 전했다. 이 기록이 맞다면 고구려는 ‘집 안에’, 백제는 ‘산 속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무령왕과 왕비의 빈소는 어디에 마련했을까. 왕과 왕비의 묘지석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무령왕이 523년 5월7일 서거…‘신지(申地·남서)’의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525년 8월12일 대묘에 안장….”

“무령왕비가 526년 11월 서거…‘유지(酉地·서쪽)’에서 빈(殯)을 치른 뒤 529년 2월12일 대묘로 옮겼다”

그러니까 왕과 왕비의 빈소(전)는 ‘유지(서쪽)’에, 무덤은 ‘신지(서남쪽’)에 각각 조성했다는 얘기다.

673년 신라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후한 부의금과 함께 악대 100명을 파견하여 장례식을 돕도록 했다. 800년 후인 조선조 성종 때도 출상 전날에는 풍악을 울려 상주와 문상객은 물론 주검까지 즐겁게 한 풍습이 있었다.

방위의 기준점은 어디일까. 국왕 부부가 생전에 거처했고, 정사를 펼쳤던 왕궁(공산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996년 공산성을 기점으로 유지, 즉 서쪽에 해당되는 지점에서 의미심장한 유구가 확인됐다.

해발 67m의 야트막한 정지산 정상(800여평)에서 매우 특이한 구조의 기와건물터(7동)이 발굴된 것이다.

그중 벽체의 흔적 없이 기둥만 3열 45개 박아놓은 건물체가 특히 수상했다.

특히 이 건물터의 내부에 세워진 4개의 기둥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 기둥 안에 시신을 넣은 관 같은 시설물이 놓여있을 가능성이 짙었다. 또 건물터 옆에는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추정)이 확인됐다.

또 정지산에서는 왜계 도기들과 함께 고창과 나주, 고령 등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상당수 보였다.

그랬다. 성왕은 부왕이 서거하자 유지(서쪽)의 땅인 정지산에 빈전을 마련한 뒤 27개월 뒤 신지(서남쪽)의 땅(무령왕릉)에 안장한 것이다. 성왕은 이곳에서 국내외 조문사절을 맞이하면서 새왕의 등극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제사상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3마리분의 은어뼈가 확인됐다. 은어는 맛이 담백하고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살에서 오이향 또는 수박향이 난다. 예부터 왕실 진상품이었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풍악을 울렸을 장례행렬’

그렇다면 525년 8월12일 시신을 대묘(무령왕릉)으로 옮기는 장례식의 광경은 어땠을까.

중국측 자료인 <수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장제가 같다’고 전제하면서 흥미로운 기사를 전한다.

“3년후 좋은 날을 가려 장사를 지낸다…장례식 전에는 곡(哭)을 하지만 장사 지낼 때에는 북치고 춤추며 풍악을 울리면서 장송한다”는 것이다. 마침 고구려 고분벽화인 안악 3호분의 ‘장례행렬도’에 인용할만한 장면이 있다.

고인을 생전 모습 그대로 수레를 태우고 가는데, 64명에 달하는 악대와 함께 춤추는 사람들이 보인다. 장례행렬이 아니라 축제 퍼레이드 같다. 따지고보면 신라 역시 비슷했다.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는 “673년(문무왕 13)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악대 연주자 100명을 보냈다”고 했다.

무령왕의 운구 행렬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슬픔과 애도의 27개월을 끝내고 새왕의 등극과 함께 펼쳐질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며 펼친 퍼레이드가 아니었을까.

무령왕릉 안에서 확인된 황금 연꽃 모양의 장식. 금함유량은 93.4~94.1%(큰 것)과 98.8~99.5%(작은 것)로 순금(24K)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금 연꽃 668점, 은연꽃 137점 등 805점의 연꽃 장식이 수습됐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혼백을 잘 모시다

무령왕의 운구행렬이 대묘(무령왕릉)에 도착했다.

대묘는 “육체의 ‘백(魄)’은 내려가고, ‘혼(魂)’은 올라간다”는 <예기> ‘예운’의 구절에 따라 사들인 무덤터였다. 아버지의 ‘백(魄)’이 머물 보금자리로 잡아놓은 곳이었다.

상주인 성왕은 그곳에 배타적인 묘제인 양나라식 벽돌무덤으로 부왕을 모실 준비를 마쳤다. 성왕은 아버지의 ‘백’을 그렇게 모셨고, ‘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모종의 장치를 마련했다.

그것이 무령왕의 발치에 나란히 출토된 청동거울과 금동신발이다. 청동거울의 명문을 보라.

“…천상에는 신선이 있어 늙는 줄 모른다. 목마르면 맑은 샘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으니 목숨이 금석처럼 길도다(…上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飢食棗壽如金石兮).”

곁에는 무령왕을 천상으로 이끌 금동신발이 놓여 있었다. 연꽃무늬와 봉황무늬 등으로 장식한 장례용품이었다.

청동거울과 금동신발은 부왕(무령왕)의 ‘혼(魂)’을 천상으로 이끄는 이른바 승선도구로 추정된다.

무령왕릉의 북벽.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전돌에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연꽃은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왕은 부왕이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인 극락세계에서 살기를 기원하며 연꽃으로 치장한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온통 연꽃으로 장식한 무덤

부왕을 그렇게 잘 모시고 1년 3개월 후 다시 어머니(무령왕비)를 여읜 성왕은 다시 왕릉 내부를 제대로 꾸민다.

무덤을 온통 연꽃으로 장식한 것이다. 무령왕릉 내부에서 수습된 연꽃장식은 805점(금제 668점, 은제 137점)에 달한다.

‘원형 장식’도 1910점 수습됐다. 이렇게 2700점이 넘은 이 연꽃 및 원형 장식은 무엇에 썼을까.

연꽃 장식을 붙이거나 꿰맨 휘장을 목관에 덮었을 수도 있고, 벽에 걸고 마지막 의식을 치른 흔적으로 보인다.

연꽃장식처럼 옷이나 천, 휘장 등에 붙어있다가 나중에 흩날리듯 떨어졌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벽돌(전돌)로 쌓은 무령왕릉의 벽과 천장은 어떤가. 대충 세어봐도 1만개가 넘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또한 무령왕 부부의 관장식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왕과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에도, 청동잔과 동탁은잔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무령왕릉 자체가 가히 연꽃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장 6년간 부모상을 마친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책임질 군주로서 정사를 펼쳤다. 538년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찾아 부여로 천도함으로써 사비 백제 시대를 열었다. 백제는 이후 120여년간 화려한 문화예술을 뽐냈다.

성왕은 왜 이렇게 연꽃으로 도배된 무덤에 부모를 묻었을까.

인도가 원산지인 연꽃은 부처의 탄생을 알린 꽃으로 알려져있다.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서 신으로 태어난다고도 믿었다. 성왕은 불가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을 롤모델로 삼은 군주라 한다.

전륜성왕은 진리의 수레를 굴리면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세계를 평정한다는 이상적인 제왕이다. ‘성왕(聖王)’이라 일컬어진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왕은 서거한 부모가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인 극락세계에서 살기를 기원하지 않았을까.

새삼 1500년전 공주에서 펼쳐진 무령왕과 그 부인의 장례식 장면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가을빛에 젖어든 공주로 여행길을 잡아보면 어떨까.(이 기사를 위해 강원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최성애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실장, 김미경 학예연구사, 서정석 공주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강원표, ‘백제 왕실 상장의례의 전개 과정-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중심으로’, <고대 동아시아의 상장의례>(학술대회 발표집), 국립공주박물관, 2022

강원표·김진경·김현희·김규동·나희라·이윤섭·최성애 등, <1500년전 무령왕의 장례>(특별전 도록), 국립공주박물관, 2023

이한상, ‘공주 정지산유적의 편년과 성격’, <백제의 왕실제사유적- ‘공주 정지산’ 학술발표회>, 국립공주박물관. 1998

김길식, ‘빙고를 통해본 공주 정지산 유적의 성격’, <고고학지> 12,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1

백제문화제재단, <무령왕 유산에 대한 융합적 검토>(무령왕 서거 1500주기 학술대회),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