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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역린을 건드려라 “내가 사심을 버리고 의견을 물은지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진언하는 자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역린(逆鱗)을 건드릴까 두려워하는 것인가.” 1491년(성종 22년) 1월 6일, 성종이 답답하다는 듯 화를 냈다. 재변이 잇달아 “내가 부덕한 탓이니 어느 누구라도 나서 무슨 말이라도 직언을 해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종은 “대체 내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임금으로 생각하느냐”고 다그쳤다. “다시 한번 고한다. 재앙을 만나서 나의 부덕함과 부족함을 듣고자 하니 기탄없이 직언해주기 바란다.” 그 후 4년 뒤인 1495년(연산군 1년), 대간이 간언(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사헌부와 사간원 등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대간이 잘못을 논한 것은 바로 공론입니다. ..
첨성대는 결국 '피사의 사탑'이 되는가 “별기에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축조했다(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는 기록이 있다.”( ‘선덕여왕 지기삼사’) 에 기록된 633년(선덕여왕 2년)의 첨성대 축조기사이다. 참으로 소락(疏略)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첨성대’가 ‘별(星)을 관찰하는(瞻) 건축물(臺)’이라는 이름이므로 천문대였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후대의 기록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지’와 ‘경주부’ 등을 보자.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척5촌, 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첨성대는 833년(선덕여왕 2년) 별(星)을 관측하는(瞻) 건축물(臺)의 이름으로 ..
조선판 '세월호' 참사와 태종의 '사과' 1656년(효종 7년) 8월27일, 전라도 해안에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전라도 해안에서 실시한 대규모 군사훈련에 참가한 전함들이 거센 비바람에 휘말려 떠내려 가거나 침몰한 것이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에서 출동한 배들이었다. 문제는 이 사고로 죽은 병사들이 1000여 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진도군수 이태형도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고는 전남 우수사 이익달이 저지른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즉 이익달이 “풍랑 때문에 바다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경험많은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훈련을 강행했다가 참변을 부른 것이다. 효종은 “보고를 듣고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다”며 “이익달 등 관련자들을 엄중 문초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시대 조운선을 복원한 모양. 을 근거로 만들었다. 태..
'신라-당나라' 연승 바둑 최강전 바둑을 일컫는 말은 여러가지다. ‘난가(爛柯)의 전설’(“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지 모른다”)에 등장하는 ‘신선놀음’이 바로 바둑을 지칭힌다. 또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 해서 ‘수담(手談)’, ‘앉아서 은둔한다’는 뜻의 ‘좌은(坐隱)’, 흑돌과 백돌을 의미하는 ‘오로(烏鷺·까마귀와 해오라기)’ 등….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지방천원(地方天圓)에서 유래된 ‘방원(方圓)’, 근심을 잊게 한다는 것에서 ‘망우(忘憂)’ 등의 이름도 있다. 경주 분황사 출토 통일신라시대 바둑판 모양 전돌. 가로 세로 각각 15줄을 넣었다. 길이 42cm, 너비 43cm. ■바둑의 기원 그런 바둑의 기원은 4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요임금의 고사이다. 요 임금에게는 단주(丹朱)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변이 없..
조선 외교관 피살사건의 전모 일본을 방문한 조선사절단 가운데 ‘계미사행단’이 있다.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계미사행단은 사절단장(정사)인 조엄(1719~1777)이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좋지않은 기상조건에서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울 신기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엄이 이끈 계미사행의 으뜸인 공이 고구마 최초도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계미사행단의 일본방문은 우여곡절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으니…. 무엇보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조선외교관이 일본인에게 피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외교관 살인사건의 내막을 한번 풀어보자. 1763년 에..
역대 최강의 '복지왕'은 세종 혹은 숙종?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다.(民惟邦本 食爲民天)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굷주림을 면치 못한다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했다.” 1419년(세종 1년), 세종 임금이 ‘억장이 무너진다’면서 “부덕한 과인 때문에 한많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만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과인이 장차 관원을 파견, 감사에 나설 것인즉….”) 과연 최고의 성군(聖君)다운 조치라고 여길 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종 뿐이 아니었다. 조선을 46년 간이나 다스린 숙종은 어땠을까. 1698년(숙종 24년) 1월, 굶주림에 얼어죽은 시신이 40~50구가 쌓였다는 소식을 들은 임..
평강공주 '통곡의 바위' 아시나요. “이것 좀 보십시요.” 아차산 구리 둘레길과 온달샘으로 가던 길, 김민수 문화유산 해설사가 이상스럽게 생긴 바위를 가리켰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의 두터운 바위….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나신(裸身)의 여성이 엎드린채 뭔가를 부여잡고 있는 또 다른 바위…. “저 바위는 화살을 맞고 죽은 온달 장군의 ‘주먹바위’라 합니다. 이 바위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평강공주가 급한 나머지 옷도 입지 않은채 달려와 온달장군의 투구를 부여잡고 엎드린채 울부짖는 ‘통곡바위’라 합니다.”(김민수씨) 나신의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의 투구를 잡고 울었다는 통곡바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어우러진 곳이다.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온달장군의 시신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민규 기자 두 사람의 혼인..
운석의 경고, "운석은 하늘의 재앙" 1492년(성종 23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돈이 “운석이 떨어졌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극돈은 매우 신기한듯 운석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빛깔은 뇌설(겉이 검고 속이 흰 버섯의 일종) 같고, 모양은 복령(주름이 많은 공모양의 흑갈색 버섯) 같은데…. 손톱으로 긁으니 가루가 떨어졌습니다.” 요즘 같은 첨단의 세상에서도 운석이 떨어지니 한바탕 난리굿을 떠는데 하물며 예전에는 어땠으랴. 2013년 2월 러이사 우랄산맥 인근 첼랴빈스크주 체바르쿨 호숫가에 떨어진 운석. 운석은 세 조각으로 부서졌으며, 전체 무게가 600㎏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104년(신라 파사왕 25년)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1057년(문종 11년) 황주에 운석이 우레 같은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