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레스보스 섬 주민들에게만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쓰게 해달라.”
2008년 에게해의 레스보스(Lesbos) 섬주민들이 그리스의 동성애 단체인 레즈비언 협회를 상대로 ‘레즈비언’ 단어의 사용 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레스보스 주민을 뜻하는 ‘레즈비언(Lesbian)’ 용어를 동성애자들에게 빼앗겨 정신적·도덕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송은 아테네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영국의 더타임스도 이 사건을 그해 ‘세계 10대 황당·엽기 소송’에 등재했다. 주민들 스스로를 ‘난 레즈비언입니다’라 소개해야 했던 게 불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레즈비언의 유래가 엄연히 이 섬에서 비롯됐으니 어쩌랴.
기원전 7세기 레스보스 섬 출신의 그리스 여류 시인인 사포가 그 주인공이다. 남편과 사별한 뒤 고향에 돌아온 사포는 사설교육기관을 세운 뒤 여성 제자들과 친구나 혹은 연인처럼 어울렸다. 특히 아티스라는 여제자를 향한 사랑과 질투를 그린 서정시는 사포를 동성애자의 원조로 만들었다.
‘나는 널 사랑하고 있었지. 아티스 오래 전부터…. 사지를 나른하게 하는 에로스가 내 온몸을 전율케 하는구나.’
사포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제자를 경쟁자에게 빼앗기는 상실감을 구구절절 토로하고 있다. 사포를 두고 ‘뻔뻔스런 동성애자’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이것은 억울한 누명에 불과했다. 당대 그리스 사회에서 양성애가 특별히 금기시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향연’을 보면 인간은 원래 두 개의 얼굴(남남, 남여, 여여)을 갖고 있다가 오만에 빠져 두 쪽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반쪽을 그리워 하는 마음에서 사랑이 싹튼다는 것.
이 가운데 원래 ‘남녀’ 한몸이던 인간은 이성애를, ‘남남’ 한몸인 인간은 게이, ‘여여’ 한몸인 인간은 레즈비언의 성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대 그리스인들의 양성애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특히 ‘원조교제’라 할만큼 성인 남성들의 미소년 탐익은 뿌리깊었다.
소크라테스마저 ‘소년의 망토 안을 얼핏 보고 흥분해서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난 야수에 사로집힌 것 같았다’고 토로할 정도였으니까. 그리스어로 체육관은 벌거벗었다는 의미의 ‘Gymnos’에서 유래됐다. 벌거벗은 몸으로 달리고 던지고 격투한 건장한 청년과의 사랑을 싹 틔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남성들은 사포가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뻔뻔스러운 동성애자’라 손가락질 하기도 했다. 자기들은 드러내놓고 동성애를 즐기면서 숨어서 몰래 즐긴 여성들을 손가락질 할 것이다. 때문에 레즈비언이라는 단어 속에는 여성비하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디.
사포는 남성들의 지독한 편견에 시달리기는 했어도 그의 사랑시는 찬사의 대상이 됐다. 철학자 플라톤은 원래 9명인 뮤즈(Muse·예술의 여신)에 덧붙여 ‘10번째 뮤즈’라는 수식어를 사포에게 붙였다. ‘뮤즈를 9명이라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 아닌가. 레스보스 섬의 사포는 왜 빼는가.’
같은 레스보스 출신의 시인 알카이오스는 사포를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와 비유했다. 이렇게 사포의 사랑시가 담겨있는 레스보스 섬이 유럽으로 탈출하려는 난민들에게 ‘죽음의 섬’으로 전락했다. 떠나려는 난민들로 뒤엉켜 지옥촌으로 변했고, 그들을 태운 소형보트가 잇달아 전복돼 아비규환을 이룬다고 한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지금 이 순간 샤를르 보들레르가 사포와 레스보스를 위해 읊었다는 시를 떠올린다.
‘어느 신이 감히 심판관이 되랴. 레스보스여…옳고 그름의 율법이 우릴 어쩌겠다는 건가…너희 종교도 다른 종교들처럼 존엄하고…사랑은 지옥도 천국도 다 비웃겠지.’(보들레르의 ‘레스보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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