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창의문(서울 종로) 근처에서 자랐던 필자에게 지금도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이 몇 편 있다. 늘 굳게 잠겨 있던 자하문(紫霞門·창의문의 별칭)과, 수확철이면 어머니가 문밖 과수원에서 한 대야씩 사왔던 능금, 소나무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송충이, 그리고 끔찍한 1968년 1월21일의 밤…. 그런데 필자의 어릴 적 기억들이 창의문의 심상찮은 역사와 맞닿아 있으니 웬일인지 모르겠다.
창의문은 소의문·광희문·혜화문과 함께 조선의 4소문으로 건립됐지만 초창기부터 출입이 통제되는 비운을 맛봤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위에서 찍어누르는 형국이니 소나무를 심어 출입을 금해야 한다”는 풍수가들의 주장 때문이었다.
창의문은 인조반정의 현장이기도 하다. 1623년 3월13일 장단부사 이서 등이 이끄는 인조반정군은 창의문의 빗장을 부수고 광해군을 쫓아냈다. 설이 분분하지만 왕위에 오른 인조 임금이 거사에 협조한 문밖 주민들을 위해 능금·자두나무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서울의 특산품으로 유명했던 ‘경림금(京林檎)’은 바로 창의문 밖 능금을 가리킨다. 1968년 1월21일 밤에는 미증유의 사건이 터진다. 창의문 옆에 뚫린 새 길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마치 구보를 하듯 뛰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한 것이다. 이것이 1·21사태이다. 창의문(자하문) 고개와 경복고 후문에서 제지하지 않았다면 청와대가 습격당할 뻔했다. 그들의 목표가 ‘박정희의 목을 따는 것’(김신조의 진술)이었다니….
그렇지만 창의문이 곡절 많은 역사만 담고 있지는 않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목재값으로만 1200원에 개인에게 팔린 혜화문·광희문과 달리 창의문만 살아남았다. 창의문을 소개한 글을 봐도 ‘바람이 물소리인지 물이 바람소리인지 자연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곳’(동아일보 1928년 5월13일)이니, ‘세잔느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곳’(경향신문 1957년 8월6일)이라느니 찬양일색이다.
서울 종로구가 창의문의 옛길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능금이 익을 무렵엔 장안사람들이 장터처럼 북적였다는 이곳…. 이참에 개국공신 정도전이 ‘올바름(義)을 드러낸다(彰)’고 해서 창의문이라 이름 지은 뜻도 한번 되새겨보기 바란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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