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질이나 스파이 노릇을 뜻하는 말 중에 ‘세작(細作)’이라는 어려운 말이 있다. 당나라 육덕명이 “첩자(諜者)의 첩은 간첩의 첩이며, 지금으로 치면 세작이다”라 풀었으니 첩자·간첩·세작은 다 같은 말이다. 세작은 절대 비겁한 전략이 아니다.
<손자병법> ‘용간(用間)’편은 ‘백성들의 희생을 최소화해서 승리를 얻으려면 반드시 첩자를 통해 적정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법이니 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략이라 할 수 있다. 4만근의 황금을 첩자들에게 풀어 초나라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갈라놓은 한나라 진평의 계책은 세작의 전범으로 꼽힌다. 세작인들은 초나라로 들어가 책사 범증이 항우를 배신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린다. 의심에 빠진 항우가 적정도 살필 겸 사신을 보낸다. 그러자 유방이 ‘몰래카메라’를 연출한다.
“범증이 보낸 사신인 줄 알았더니 항우의 사신인가.”
그러면서 진수성찬으로 차린 잔칫상을 황급히 거두고 초라한 상으로 바꾸었다. 깜빡 속은 초나라 사신은 귀국하자마자 항우에게 즉보했다. 항우와 범증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초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후한 시대 인물인 우후(虞후)는 도적떼가 들끓자 바느질하는 사람들을 세작으로 삼아 도적의 소굴로 밀파한다. 이들은 색깔 있는 실로 도둑의 옷을 기워 표시를 했고, 우후는 저잣거리에 출몰하는 도적들을 보는 족족 사로잡았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이 친노계 김경협 의원의 ‘비노(非盧) 세작’ 발언으로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새누리당 세작들이 당에 들어와 당을 붕괴시키려 하다가 들통났다는 것이다.
혁신을 하자면서, 게다가 메르스·가뭄 등으로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한 판국에 이 무슨 밥그릇 싸움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X맨’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출연한 연예인들 사이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한 명의 X맨을 가려내는 게임이다. 그러니 X맨은 다른 말로 세작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X맨은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 혹은 되레 상대방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간첩을 지칭하는 ‘예능언어’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세작’ 촌극을 보면 꼭 ‘X맨’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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