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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콩가루 집안'을 욕하지 마라

 콩(豆)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청빈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두반곽갱(豆飯藿羹·콩잎과 콩잎국)은 본디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리키는 사자성어다. ‘콩밥 먹는다’는 표현은 감옥살이를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    

  특히 일제 시대(1936년) 형무소 식단을 보면 콩이 40%나 들어가 있었다. 식감이 좋지 않은 콩을 씹느라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재소자들의 건강을 위해 단백질을 먹인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과연 그런 기특한 생각 때문이었을까. 콩과 관련된 최악의 표현은 역시 ‘콩가루’일 것이다.
 8·15 해방 이후 쌀 부족 때문에 ‘콩가루’를 배급받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콩가루가 좋은 인상을 줄 리 없었다. 당시 언론까지 나서 ‘우리네 습관에 익숙지 않은 콩가루 먹는 법’, 즉 콩가루 레시피를 소개했다.(경향신문 1947년 10월19일)  

탄수화물 식품(밥)에 비해 배도 부르지 않고 미풍에도 뿔뿔이 흩어지는 콩과 콩가루는 나쁜 이미지를 굳혔다. 벼나 밀과 달리 콩깍지 안에 여러 개의 콩이 따로 들어있고 그 콩알 자체도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콩가루 집안’이라는 소리가 나왔다는 설까지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 ‘모래알’이 있지만, 그보다 입자가 미세한 ‘콩가루’는 더더욱 도덕적으로 타락한 집단이나 가족을 지칭하게 됐다. 그랬던 콩가루가 최근 반전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식물성 고단백의 고소한 웰빙음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음식뿐이 아니다. ‘콩가루 집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이 이뤄진다’는 젊은이의 외침까지 등장했다.(박연의 <인문학으로 콩을 갈다>에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 친구가 되어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바로 콩가루 문화’라는 것이다.
  얼마 전 새누리당 김태호 최고위원이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둘러싼 당내 갈등을 두고 “콩가루 집안이 잘되는 것 못 봤다”고 자탄했다. 그날 밤 TV예능프로그램에서 어떤 중국요리 셰프는 자장면의 고소한 맛을 내는 비법으로 ‘콩가루’를 꼽았다.

  그러고 보니 콩가루는 너무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음식을 먹기 좋게, 모양 좋게 만드는 성질을 갖고 있다. 만약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진정한 콩가루 집안이라면 김태호 최고위원의 자탄과 달리 ‘잘되는 집안’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달라진 콩가루의 반전 매력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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